원전 비상 매뉴얼은 세계적 수준인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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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비상 매뉴얼과 안전 시설은 세계적 수준, 안전 의식은 미흡’.

 고리 1호기 중대 사고의 조직적 은폐 사건을 보며 우리나라 원전 관리시스템에 대해 전문가들이 매긴 성적표다. 우리나라 21기의 원전은 각각 300여 쪽의 ‘방사선비상계획서’를 갖추고 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원전 선진국의 사례를 가져와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든 것이다. 그 속에는 각종 비상 상황 때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행동 수칙이 빼곡히 적혀 있다. 매뉴얼로 봐서는 세계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고리 1호기의 완전 정전(Black out) 사고 때의 행동 수칙을 보자. 비상 발령을 내려야 하는 20가지 상황 중 7번째 ‘모든 원전 내·외 교류 전원 상실’, 8번째 ‘모든 직류전원 상실’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이런 사고가 발생하면 현장 발전팀장이 곧바로 비상 발령을 내려야 한다. 화급히 비상을 내려야 하는 사고이기 때문에 그의 상급자인 발전소장한테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한 것이다. 발전팀장은 비상을 내리는 것과 병행해 현장 전문가들과 즉시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되어 있다. 상부기관 보고는 비상 발령 뒤 15분 안에 구두보고를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번에 이런 절차 중 현장 조치는 했으나 보고 체계에 구멍이 뚫렸다.

 장순흥 한국원자력학회장은 “원전 안전에 대한 국민의 인식 향상을 위해 그동안 노력한 수고가 고리 1호기 은폐 사건으로 한 방에 날아간 것 같다”며 “주변 상황이나 윗사람의 눈치를 봐가며 보고를 할지 말지 결정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매뉴얼대로 내용을 보고해야 후속 조치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원전 안전 시설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정전에 대비해 외부 전원 두 라인, 비상 디젤발전기 2대, 예비 비상 디젤발전기 1대가 별도로 갖춰져 있다. 원자로를 가동 중일 때 완전 정전이 돼도 냉각수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저수 탱크가 있어 며칠을 버틸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의 원인이 됐던 수소 제거 장치도 우리나라 원전에는 달려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백원필 박사는 “매뉴얼을 잘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매뉴얼을 잘 지키는 자세와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원전 사고인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 옛 소련 체르노빌 사고도 사소한 판단 실수와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것이 큰 화를 불렀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도 전원 없이도 돌아갈 수 있는 1호기의 냉각수 순환 관련 장치가 막혀 있는데도 모든 사람이 정상 작동 중으로 판단해 사고를 더 키웠다.

 최근 구매 담당 직원의 자살 사건을 부른 고리 원전의 ‘중고 부품’ 납품 비리도 매뉴얼대로라면 발생하기 어렵다. 원전 부품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어 하나하나 정품인지 새 제품인지 확인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깐깐한 점검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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