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랜드마크를 찾아서]5.스페인 '빌바오구겐하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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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사보다 황소를 사랑하고, 부유하지만 무덥고 추한 광산 도시." 생전에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을 유난히 사랑했던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는 1930년 〈정오의 죽음〉에서 빌바오를 이렇게 묘사했다.

하지만 오늘날 '추한 광산 도시' 빌바오의 모습은 중앙역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대형 스테인드 글라스에서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역에서 한걸음만 나서면 기품있는 베란다를 갖춘 전통 석조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고층빌딩들,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유리로 된 첨단 기법의 반원형 지하철 입구 등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하이테크 도시의 전형이다.

사실 80년대까지만해도 헤밍웨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19세기 이후 빌바오는 풍부한 철광석을 제련해 영국에 수출하고 용광로를 가동시키기 위해 석탄을 수입하는 공업도시이자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잘나가던 철강산업 사양길

돈은 넘쳐흘렀지만 산이란 산은 모두 파헤쳐져 흉한 몰골을 드러냈고 제철소에서 뿜어낸 검은 매연이 만든 스모그가 온 도시를 뒤덮었다.

"한마디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도시였죠. 초등학교 시절 매캐한 안개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학교에 갔던 것이 한두번이 아니라니까요." 빌바오 도심에 있는 레스토랑 '볼라 비가'의 지배인 오스카 알베르디(30)의 회상이다.

70년대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거센 도전에 부딪쳐 경쟁력을 상실한 빌바오는 제련소와 공장들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면서 죽은 도시로 변해버렸다.

"80년대말 빌바오 주민 1백만명 중 4분의 1이 실직 상태였다"고 96년 헤랄데 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작가 페드로 우가르테는 설명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 마을과 함께 우리의 삶과 긍지를 동시에 되찾았다"고 강조하는 그는 회생의 원동력으로 빌바오의 젖줄인 네르비온 강변에 자리잡은 구겐하임 미술관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91년 바스크 자치정부는 악성 경기침체에서 탈출하기 위해 때마침 유럽 진출을 모색하던 세계적 명성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빌바오에 유치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각

미국 구겐하임 재단과의 협상 끝에 1억달러(약 1천1백억원)에 달하는 건설비의 대부분을 바스크 정부와 지역단체들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미술관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예산 낭비와 문화적 종속을 우려하는 일부 반대 여론 속에서 설계를 맡은 캐나다 태생의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 현대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기념비적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이 미술관은 물고기 비늘 모양의 곡선미 넘치는 타이타늄 벽과 각진 석회암 블록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표현주의 모던 스타일의 건축물.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 같다.

유리벽은 작품을 열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자연 채광을 가능케 했으며 벽에 입힌 두께 0.5㎜의 타이타늄 패널은 건물의 내구성을 1백년 이상으로 확장시켰다.

침체 경기 회생의 원동력

구겐하임 빌바오는 97년 10월 19일 개관 이래 3년 만에 3백50만명이 다녀갔다. 방문객이 많기로는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이어 스페인에서 두번째다.

미술관 건립을 거세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구기(구겐하임 미술관의 애칭)'의 찬양자로 바뀌었다.

구기는 미국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분관이 아니라 빌바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지난해 빌바오 7백주년을 맞아 발행한 기념우표에도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세살배기 구기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방문객이 없어 근근히 명맥만 유지해오던 빌바오 시내의 다른 미술관·박물관들도 다시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

빌바오 미술관은 구기 개관 이후 관람객 수가 두배로 늘어 지난해 23만명이 다녀갔으며 민족역사 박물관 역시 17%가 늘었다.

아마이아 바스테레세아 박물관장은 "사람들이 구겐하임에서 현대미술을 보고 우리 박물관을 찾아 바스크의 전통에 대해 배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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