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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서히 바스러졌다 존엄한 소멸…봄, 죽음을 말하기 좋은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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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의 상영관에 들어설 때만 해도 내 관심은 어디까지나 ‘집’이었다. 땅과 인간의 조화를 으뜸으로 친 건축가 정기용(1945~2011). 그의 작품 세계를 보다 조밀하고 생생하게 접하고 싶었다. 한데 정작 내게 육박한 건 집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감독 정재은이 그를 찍기 시작한 건 2010년 초였다. 그는 이미 5년째 암 투병 중이었다. 영화는 그 과정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정 감독은 직접 쓴 제작기에서, 나중에야 자세한 투병 내용을 알고 몹시 괴로웠다고 했다. 대장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 수술과 항암 치료, 암 전이로 인한 폐 수술과 간 수술, 마이크를 휴대해야 할 지경의 성대 결절, 매일 차오르는 복수.

 피붙이의 암 투병을 겪어본 이라면 알 것이다. 그것이 인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통증, 공포, 좌절, 무력감. 정기용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갈수록 굼떠지고 수척해질 뿐이다. 그렇게 한 생명이 눈앞에서 바스러지고 있었다. 참혹하기보다 경이로웠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들 때문이다.

 걷기 힘들 만큼 쇠약해진 그가 차를 타고 어딘가 간다. 창밖으론 가을볕이 한창이다. 반짝반짝 손 흔드는 나뭇잎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순정한 기쁨이다. 그이보다 더 깊이 그 계절을 느낀 이 몇 명일까. 낡은 연립, 20평 남짓한 월셋집에서 그가 마룻장에 깃든 좁다란 햇살에 발을 포갠다. 어찌 보면 호화스러운 집이라고, 참 좋다고…. 그는 생전 전국 6개 소도시에 ‘기적의 도서관’을 지었다. 건물 안팎에서 아이들은 자유롭다. 양말 벗고 누워 책을 읽는다. 노을빛 받으며 술래잡기를 한다. 자신을 버리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집을 지은 한 건축가 덕분이다.

 2011년 3월 5일 정기용은 수십 년 함께해온 사무소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고개 들 힘도 없어 앰뷸런스를 타고 경기도 광주 아천동 숲으로 갔다. 가족 같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온몸으로 봄을 맞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엿새 뒤 그는 영면에 들었다.

 가까운 이 여럿을 암으로 잃었다. 견디기 위해 견디는 지루한 고통. 나만은 다른 방식으로 갈 수 있길 오래 빌어왔다. 그런 내게 정기용의 죽음은 견디는 것도 삶이며, 그 또한 값진 마무리임을 알게 했다. 그는 투병 중 여섯 권의 책을 냈다. 전시회를 열고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힘 다해 했다. 정 감독의 회고처럼 ‘한번도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곧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 우주를 완성했다. 죽음은 한편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가. 이 봄, 일년생 들꽃처럼 군더더기 없는 그의 생로병사에서 존엄한 소멸을 배운다.

이나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