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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53) 불화 그리고 음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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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DJ 정부 실세로 꼽히던 김중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권노갑 국민회의 상임고문, 김상현 의원(오른쪽부터)이 1999년 2월 14일 서울 근교 한양 컨트리클럽에서 라운드 중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금융감독위원장. 원래는 주목받을 자리가 아니다. 앞에 나설 일도 없어야 하는 자리다. 외환위기가 아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자리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다. 기업·금융 구조조정 업무가 금감위에 떨어지면서다.

 DJ 쪽 사람들은 처음엔 그 무게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니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의 추천대로 나를 앉힌 게 아닐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얼마나 막중한 자리인지 깨달은 것 같다. “이헌재는 적임이 아니다.” 나를 흔드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나는 가시방석이었다. 어항 속 물고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수족관이 아무리 커봤자 어항이다. 바깥에선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인다. 금감위원장도 예외가 아니다. 구조조정. 생사가 걸린 문제다. 모두가 눈을 벌겋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 한 명 만나기가 조심스러웠다. 여권 실세를 한 명 만났다 치자. 다음 날 내가 발표하는 구조조정의 진의(眞意)를 누가 믿어줄 것인가. “정부가 개입했다.” “실세가 조종했다.” 온갖 말이 나오게 돼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외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래도 뒷말이 나왔다. ‘끈도 없는 사람이 중책을 맡았다. 뭘 부탁하려 해도 통 만나주지도 않는다.’ 여권 실세들의 눈엔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위원장님. ‘이헌재가 뻣뻣하다’고 욕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김영재 대변인이 가끔 성화를 부렸다. 호남 출신인 그는 청와대 소식에 밝았다. “그러지 말고 여권 사람들 좀 만나십시오. A비서관이 ‘이 방에 안 다녀간 장관은 이헌재밖에 없다’고 대놓고 눈치를 주는데 민망해서….”

 못 들은 체했다. 김영재는 몸이 달았던 모양이다. 공연한 일을 만들었다. 국민회의 권노갑 상임고문을 찾아가 “위원장님과 점심 한번 하시자”며 먼저 약속을 잡아온 것이다. DJ정권 실세 중의 실세라는 권노갑 고문. 난감했다. 남들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다.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다.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권 고문은 또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약속 장소는 신라호텔 중식당. 권 고문은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일부러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간단한 인사. 그리고 그는 간단한 식사를 시켰다. 옮길 만한 얘기는 오가지 않았다. 서로 덕담을 건네는 정도였다.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분쯤 지났을까. 나는 준비한 말을 꺼냈다.

 “고문님. 남의 눈도 있고 해서 제가 자주 뵙지 못합니다. 체면이 있으시고 하니까 하실 말씀 있으시면 김 대변인을 통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한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황당했을 것이다. 먼저 만나자고 하더니 이 태도는 뭔가, 싶을 만하다. 그런 마음을 얼굴에 드러낼 사람은 아니다. 가볍게 웃으며 “알았다”고 짧게 답했다. “그럼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왔다. 김영재가 민망한 표정으로 허둥지둥했다. 이날 일은 소문이 고약하게 났다. 여당 인사들은 “이헌재가 권 고문을 홀대했다더라”며 기분 나빠 했다고 한다.

 이 일이 아니어도 나를 욕하는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내 귀에 들릴 정도였다. “이회창 캠프 출신” “정권에 비협조적” “자민련 편만 든다” 등등. “이헌재는 항상 작취미성(昨醉未醒·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음)”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술을 많이 마시던 때이긴 했다. 일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서였을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폭탄주를 두어 잔 마셔야 잠이 들곤 했다. 새벽에 동네 체육관에 들러 찬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이를 두고 “술이 안 깼다”고 손가락질을 했다는 거다.

 나를 둘러싼 음해는 98년 가을 최고조에 달한다. 대통령 법무비서실에서 DJ에게 특별 보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 앞에서 차트를 넘겨가며 나를 험담했다는 것이다. 12개 시중은행 행장의 출신 지역을 그린 차트였다. 요컨대 “이헌재가 호남 출신 행장들을 다 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박할 가치도 못 느꼈다.

 하지만 DJ는 흔들렸던 모양이다. 강봉균 당시 경제수석에게 “호남 사람들이 역차별을 당한다는데 맞는지 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나에 대한 계좌 추적, 내사설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별의별 악성 루머까지 돌았다. 아는 사람을 통해 내사설의 진위를 알아보려 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는 유야무야됐다. 한참이 지나고 정부를 떠난 뒤에야 당시 사정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이런 음해 속에서도 99년 5월 개각 때 나는 유임됐다. 금감위의 구조조정 작업이 정점을 향해 치닫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수장을 교체하기가 번거로웠을 것이다. 해외 여론도 신경 쓰였을 것이다. 정치권의 공격과 달리 해외에선 한국의 구조조정에 대해 호평이 많았다. 그 무렵 해외 유력 매체들이 잇따라 나를 ‘올해의 구조조정 기관장’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개각 이후 일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관계 부처 장관들과 협의가 잘되지 않았다. 청와대 쪽과의 소통은 끊기다시피 했다. 복잡한 구조조정이 대충 마무리된 99년 말, 나는 한광옥 비서실장에게 사의를 표했다. ‘이만하면 됐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위기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혼자 정책을 구상하던 때도 있었다. 속수무책인 처지가 우울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않은 중책을 맡았고, 내 뜻을 모두 펼쳐 보였다. 남은 아쉬움은 없었다.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재정경제부 장관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99년 1월,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국무총리에 임명되고 엿새 만에 나는 재경부 장관에 내정된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떠났어야 했다. 이미 경제의 계절은 끝나고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등장인물

▶권노갑(82)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목포상고 4년 후배로 DJ가 정치에 입문한 이후 줄곧 곁을 지켰다. DJ의 분신으로 불릴 정도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국회에 발을 들인 뒤 14·15대 의원을 역임했다. 99년 국민회의 상임고문,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2003년 ‘대북 송금사건’으로 형사처벌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강봉균(69)

옛 경제기획원 출신의 정통 관료. 97년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DJ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경제수석비서관을 잇따라 맡는다.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뒤 정계에 입문, 16·17·18대 의원을 지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대해 당내 온건파에 속한다. 최근 민주통합당 19대 총선 공천심사에서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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