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내년이 걱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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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집안싸움에 흥분하고 몰두한 나머지 온 식구를 태운 배가 어디로 떠내려가는지도 모른 채 격한 풍랑을 맞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선거 열기에 휩싸이기 시작한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런 형국이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지구촌 전체를 덮고 있는 경제 위기의 먹구름은 좀처럼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이로 말미암은 사회적 고통은 곳곳에서 정치적 파탄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초강대국시대를 대치할 다극체제의 출범은 아직도 묘연한 상태이며 힘의 재분배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불안정도 잠재적 위험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얼마 전 브레진스키 교수는 이러한 세력의 재편 시기에는 모든 국가가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승자보다 패자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지금과 같은 세력 판도의 전환 고비에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선택의 시간에 일순위로 직면하게 될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 그의 말은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제국주의시대에 식민지의 수모를 겪었고 냉전시대로 이어진 민족 분단의 고통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 우리로서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세력 판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체질화된 지 이미 오래다. 지금도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세계 1, 2, 3위를 점하고 있는 미·일·중·러 네 나라는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우리보다 훨씬 큰 나라들임을 항시 유의해야만 한다. 이들 네 강대국 간의 관계와 조합, 그리고 남북한과의 관계와 조합이 어떤 양태로 형성될 것인가는 바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좌우하는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렵고 어수선한 국내 사정에 함몰되다 보면 그렇듯 중요한 열강들과의 관계 진전에 소홀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우리의 근접한 이웃이며 세계 제2, 제3의 경제대국인 중국과 일본의 관계 진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노다 총리는 5월 초 한·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중국을 방문하고 한·중·일 FTA 교섭 개시와 북한 핵문제에 대한 협의를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한·미 FTA에 대한 국내에서의 격론이 심화되는 속에서도 한·중·일 FTA와의 연관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게을리 할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미·중 두 강대국 관계의 이중성, 즉 대결 측면과 협조 가능성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음도 새겨두어야 한다. 지난 2월 9일 미국아시아협회의 홍콩센터 준공식 기조강연에서 중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며 전 홍콩행정장관인 퉁치화는 ‘미국은 오래전부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아시아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미·중이 함께 아시아·태평양시대를 열어갈 것을 강조했다. 그 이튿날 퉁치화는 시진핑 부주석을 수행해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56년 전 록펠러 3세가 아시아와의 문화교류를 위해 뉴욕에 창립한 아시아협회의 홍콩지부를 아시아에서의 활동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홍콩 시정부는 최적의 시유지를 무상으로 기부하고 홍콩재계는 미화 5000만 달러의 센터 건립자금을 기꺼이 부담했다. 이렇듯 미·중 관계의 한 단면이 보여준 복합성과 복잡성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과 우리의 ‘전략적 동반자’인 중국의 관계에 못지않게 한·중·일 3국 관계의 발전 방향이나 러시아의 새로운 아시아 정책에도 응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국제경쟁 속에서 상대적인 취약성을 지닌 우리가 국가 이익을 지키고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남보다도 확실한 국가 목표와 치밀한 전략이 전제되어야 함은 자명한 논리이다. 우리와 같은 민주국가에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폭넓은 국민적 합의와 이를 바탕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유능한 정치리더십이 필수임은 물론이다. 선거의 해를 맞은 격동의 한국정치가 과연 그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지.

 선거란 싸움과 시합의 성격을 함께 지닌 경쟁으로 그 경주에 몰입돼 있는 선수들에게는 대화, 화합, 타협 등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선거 후에도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공동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 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여야 대연정이란 타협의 정치로 역사의 풍랑을 헤쳐갈 수 있었다. 선거의 열기와 흥분으로 끊기기 쉬운 여야나 정치세력 간의 소통의 줄, 혹은 타협의 다리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지혜로운 정치인들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오죽하면 전 국민으로부터 ‘야합’에 의한 국회의 300석 선거구 획정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는 여야 지도부이지만 이는 타협의 정치를 위한 시작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겠는가. 내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