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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CDS는 금융 살상 무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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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호 29면

맞은 자는 다리를 뻗고 자도, 때린 자는 오그리고 잔다. 하지만 이 말에 정반대되는 일이 국제금융시장에선 더 흔하다. 그리스에 돈을 빌려줬다가 떼이는 채권자들, 피해자답게 몹시 괴롭다. 거액을 날려 속 쓰리고, ‘무능하다’는 조롱에 풀이 죽는다. 그래도 일부 투자자는 믿는 게 있었다. 크레디트 디폴트 스와프(CDS)다. 돈 떼일 상황에 대비해 들어둔 보험이다. 똑똑한 CDS 매수자들은 보험금을 받아 손실을 벌충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그런데 이게 불확실해졌다. 지난 1일 국제스와프파생상품협회(ISDA)가 그리스에 대한 채무 조정의 경우 보험금을 지급할 만한 사고(신용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잠정 판정했기 때문이다. 돈 떼이는 일은 생겼지만 보험금을 지급할 사고는 아니라는 유권해석이다. 그 파장을 가늠하는 게 쉽지 않다. 신용사건 발생 여부가 문제되는 것 자체가 국채 CDS 시장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스 채권과 연계된 CDS 보험금은 최대 32억 달러다. 전체 빚 규모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국채 CDS 시장 규모는 2조9000억 달러(약 3200조원)나 된다. CDS의 헤지 기능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면 CDS 매수가 줄고, 이에 따라 유로존 취약 국가의 국채에 대한 투자도 주춤해질 수 있다. 위험을 막을 방패라고 해서 사려는데 ‘불량 방패’라고 한다면 그걸 누가 사겠는가. ‘채권왕’ 빌 그로스가 ISDA의 결정이 “나쁜 선례”라고 한 건 의미심장하다. CDS 무용론은 지난해에도 제기됐다. 가격 변동성이 너무 심해 디폴트 리스크를 가늠하는 잣대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국채 CDS 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ISDA의 위원회에 맡기는 것에도 이견이 적지 않다. 위원회에는 15개 은행 대표그룹이 참여한다. 다른 금융회사는 참여할 수 없다. 회의 기록은 공개되지 않고 그 결과만 공표된다. 항변할 기회도 없다.

그리스 국채 CDS 매수자들이 당장 보험증서를 분쇄기에 갈아버릴 것 같지는 않다. ‘집단행동조항(CACs)’을 그리스가 발동하면 ISDA의 판단이 달라질 것이란 예상이 우세해서다. CACs는 내켜 하지 않는 채권자까지 손실이 불가피한 국채 교환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판정 시점이 중요하다. 신용사건이란 판정이 그리스의 CACs 발동 후에 내려지면 투자자가 받는 보험금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못 믿을 CDS인 건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다.

CDS는 부실자산, 독성자산(toxic asset)의 해독제로 출발했다. 하지만 때때로 난폭 운전자가 든 범칙금 보장보험 같다. ‘가짜 안심’을 제공해 무모한 투자를 부추기는 부작용이 드러났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은 CDS를 ‘금융 대량 살상 무기(financial weapons of mass destruction)’라고 부르며 경계했다. 그리고 지금은 헤지, 위험 잣대 등 본연의 구실까지 의심받고 있다. 그리스의 채무 조정 못지않게 CDS의 기능·규범 조정을 기대해 본다. 악마도, 신도 디테일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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