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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다 싶으면 아낌없이 ‘지르는’ 킹메이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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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호 12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하비 와인스타인.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인 그는 지난해에도 ‘킹스 스피치’를 맹렬한 홍보마케팅 끝에 작품상 등 4관왕에 등극시켰다. [LA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산(産) 흑백 무성영화는 어떻게 쟁쟁한 미국 영화들을 제치고 아카데미 5관왕이 됐을까.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920∼3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아티스트’가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의상상·음악상 등 5관왕에 올랐다.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의 3D영화 ‘휴고’는 기술 부문 5개 상 트로피를 가져가는 데 그쳤다. 톱스타 조지 클루니 주연 ‘디센던트’도 각색상에 머물렀다. 무성영화가 작품상을 타기는 1929년 제1회 시상식 이후 80여 년 만에 처음이다.
대사 없이 음악만 나오는 흑백영화 ‘아티스트’의 수상은 아무리 봐도 의외다. 최근 할리우드의 흐름을 거스르는 결과여서다. ‘아바타’ 이후 할리우드엔 3D나 아이맥스 등 기술적 성취를 앞세운 영화들이 부쩍 늘었다. ‘타이타닉’ ‘라이언킹’ 등 2D영화를 3D로 바꿔 재개봉하기도 한다. ‘아티스트’는 소재도 아날로그 느낌이 물씬하다. 한물간 스타를 아리따운 여성이 사랑으로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아카데미 5관왕 ‘아티스트’ 숨은 손, 하비 와인스타인

영화도 임자를 잘 만나면 팔자가 달라지는 것일까. ‘아티스트’가 아무리 작품성을 인정받았더라도 이 걸출한 장사꾼이 없었다면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진 못했을 것이다. ‘아티스트’의 미국 배급사 와인스타인 컴퍼니의 CEO 하비 와인스타인(60) 얘기다. 그와 동생 밥(58)은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1952년 뉴욕에서 태어난 하비는 어려서부터 영화업계를 동경했다. 70년대 초 뉴욕주립대를 졸업한 그는 동생과 함께 무작정 록콘서트 기획에 뛰어든다. 몇 번의 성공적인 공연으로 종잣돈을 마련한 이들은 79년 영화사 미라맥스를 차린다. 회사 이름은 유대계 부모 미리엄(어머니)과 맥스(아버지)를 합친 것이었다.

독립·예술영화를 주로 배급하던 미라맥스는 89년 단숨에 메이저급으로 떠오르는 행운을 잡는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배급하면서다. 이들은 제작비 120만 달러(약 13억원)에 불과한 이 저예산영화를 개봉해 2500만 달러(약 280억원)라는 경이로운 수익을 거둬들인다. 이어 퀜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을 만들어 흥행시키면서 미라맥스는 제작사로서의 입지도 굳힌다.

1920∼30년대 할리우드를 무대로 한 ‘아티스트’.

93년 형제는 디즈니에 미라맥스를 거액에 넘겼고, 2005년 독립해 오늘날의 와인스타인 컴퍼니를 차렸다. 지금까지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TV 리얼리티쇼의 대명사 ‘프로젝트 런웨이’ 등을 제작했고, ‘셰익스피어 인 러브’ ‘잉글리시 페이션트’ ‘시카고’ 등 3편의 작품상 수상작을 배출했다.

될성부른 작은 영화를 골라내 크게 키우는 게 와인스타인의 장사 수완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예외 없이 능력은 발휘된다. 전략은 이렇다. 괜찮은 중간 규모 영화를 산다. 이미 유명한 작품은 관심에 두지 않는다. 극장 수는 적게 시작해 입소문에 따라 점차 늘려간다. 오스카 시상식 두세 달 전 맹렬한 마케팅을 통해 유력 수상 후보로 키운다. 그가 ‘아티스트’를 처음 본 건 지난해 초. 제64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고 난 직후였다. 규모도 작고 미국에 인지도가 낮은 프랑스 예술영화지만, 미국에 개봉시켜 오스카상 후보에 올릴 만한 ‘물건’임을 그는 그 자리에서 확신했다. “난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영화를 본 즉석에서 미국 배급권을 사들였다.

‘아티스트’를 위해 그는 ‘노스탤지어(nostalgia·향수) 마케팅’을 펼쳤다. 평균 연령 62세인 아카데미 회원들이 갖고 있는 할리우드 고전영화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회원들은 이 프랑스 영화가 자신들의 고전과 흘러간 시대에 존경심을 표현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그는 시사회에 ‘무성영화의 황제’ 찰리 채플린의 두 손녀를 데려왔다. 채플린의 손녀 카르멘과 돌로레스는 “할아버지가 이 영화를 봤더라면 꽤 좋아하셨을 것”이라며 분위기를 돋웠다. 이 영화다 싶으면 홍보비를 아낌없이 ‘지르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아티스트’엔 제작비(1600만 달러)를 웃도는 마케팅비를 쏟아부었다.

미셸 아자나비시우스 감독 등 제작진은 이에 맞춰 어마어마한 홍보 일정을 소화해냈다. 고전적인 풍모의 신사 장 뒤자르댕과 우아한 미녀 베레니세 베조, 주름살 깊은 연륜의 미국배우 존 굿맨 일행은 시상식 석 달 전부터 대륙과 대륙을 누비며 각종 토크쇼 출연과 파티 참석, 인터뷰 등을 했다. 영화에 출연한 견공(犬公) 어기가 동행했다. 어기의 죽은 척하는 깜찍한 연기에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어느덧 이름 없는 흑백 무성영화는 ‘할리우드 고전에 경의를 바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화’로 변신했다. 와인스타인의 마케팅이 얼마나 맹렬했는지 심지어 LA 시의회는 1월 31일을 ‘아티스트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구호는 ‘느끼는 데는 말이 필요 없다(You don’t have to say anything to feel everything)’였다. 5관왕을 차지한 후 와인스타인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아티스트’를 민 건) 100만 분의 1 확률, 아니 200만 분의 1 확률이었다”며 승리를 만끽했다.

지금까지 그가 제작과 투자배급에 관여한 영화 중 300편 이상이 오스카 후보에 올랐다. 지난해에도 오스카 트로피를 향한 ‘킹메이커’의 승부사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각본상 등 주요 4개 부문 트로피를 휩쓴 ‘킹스 스피치’가 그것이다. 영국 영화 ‘킹스 스피치’의 맞수는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받은 ‘소셜 네트워크’였다. 아랍권 민주화 등과 맞물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돌풍이 불자 말더듬이 왕과 언어치료사의 우정을 그린 시대극은 페이스북 창립 비화에 비해 다소 평범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홍보전이 시작되자 풍향계는 바뀌기 시작했다. 와인스타인은 이 영화를 훈훈한 감동과 교훈을 주는 가족영화로 포장했다. ‘킹스 스피치’는 애초 청소년 관람불가에 해당하는 R등급을 받았다. 비속어 등이 나오는 장면 때문이었다. 그는 감독과 제작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편집 끝에 PG-13(13세 이하면 부모 동반 관람) 등급을 받아 관객층을 넓혔다.

할리우드에서 와인스타인의 평판은 극과 극을 오간다. 배우들 사이에서 와인스타인의 별명은 ‘퍼니셔(punisher, 벌 주는 사람)’다. 워낙 물샐 틈 없는 홍보 일정에 배우와 감독을 쉴 새 없이 몰아넣어서다. 팝스타 마돈나는 ‘W.E.’ 감독을 맡아 와인스타인과 함께 일한 후 그의 지독함에 넌덜머리를 냈다고 한다. 마케팅 컨셉트에 맞춰 영화를 재편집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 ‘가위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붙었다. 돈을 퍼붓는 물량공세를 곱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다. 반면 와인스타인 컴퍼니가 배급한 ‘철의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메릴 스트리프는 그를 ‘하느님’이라고 추앙한다.

‘아티스트’는 이미 미국 내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겼지만 성공신화는 미완성이다. 보통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면 시상식 후 극장 수입이 평균 20∼30%가량 증가한다. ‘킹스 스피치’도 수상 후 추가로 2400만 달러(약 269억원)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아티스트’가 흑백에 무성영화라는 점은 여전히 핸디캡이다. 한국 성적은 꽤 좋다. 지난달 16일 개봉해 3일 현재 8만 명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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