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실망? … 미 국채 매물폭탄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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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의회 통화정책 보고에서 3차 양적완화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아 금융시장을 놀라게 했다. 버냉키 의장이 이날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해 반기 통화정책 보고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증언하고 있다. [워싱턴 AP=연합뉴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오전 10시쯤이었다. 미국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선 파란이 일었다. 미국 10년 만기 국채선물 매도 주문이 쏟아졌다. 10만 계약 이상이었다. ‘매물 폭탄’ 수준이었다. CME 미 국채선물의 분당 거래량은 5000~1만5000계약 정도다. 평상시 거래량보다 작게는 6.6배, 많게는 20배나 되는 팔자주문이 밀려들었다. 정확한 정산금액은 전해지지 않았다. 줄잡아 수십억 달러는 될 것이라는 게 CME 안팎의 추정이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순간 미 국채의 얼굴 격인 10년 만기 재무부채권 값이 출렁거렸다”고 보도했다. 그 결과 10년 만기 재무부채권 수익률(시장 금리)이 연 1.93% 수준에서 2%를 돌파했다. 미 국채시장에서 보기 드문 금리 급등이다.

 매물 폭탄의 파장은 국채시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충격파가 주식·금·은시장으로 퍼져나갔다. 뉴욕 증권시장의 다우와 나스닥지수가 순간 가파르게 떨어졌다. 다우지수는 하루 전 1만3000선을 돌파해 2008년 금융위기 상흔을 다 지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건 당일도 처음엔 오름세였다. 하지만 매물 폭탄 직후 가파르게 미끄러졌다.

 시카고에서 매도 사태가 벌어진 지 40여 분이 흐른 뒤인 이날 오전 10시48분 뉴욕상품거래소에선 금 선물을 팔자는 주문이 밀려들었다. WSJ는 “18억 달러에 달하는 금 선물 계약 1만1000계약이 순식간에 이뤄졌다”고 전했다.

 국채 ‘매물 폭탄’이 나오자 처음엔 실수로 받아들여졌다. 영미권에서 ‘살진 손가락(Fat Finger)’으로 불리는 주문 실수란 얘기다. 어느 금융그룹 트레이더가 컴퓨터 자판을 잘못 친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실수가 아니라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계약이 취소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됐다. 일반적으로 트레이더가 실수하면 주거래 증권사를 통해 취소하고 수습에 나선다. 마이클 쇼 CME 대변인도 “이날 (계약 취소 같은) 사건은 없었다”고 확인했다.

 그 매도 주문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만한 정황도 있었다. 그때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의회에서 경제와 통화정책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매물 폭탄이 쏟아지기 직전 3차 양적완화(QE)가 들어 있지 않은 발언록이 사전 공개됐다.

 미국 다이와증권의 선물매매 책임자인 처크 레츠키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버냉키가 3차 양적완화를 언급할 것으로 기대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버냉키 발언에 실망한 시장 참여자가 국채선물을 팔아치웠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누가 무슨 이유로 국채선물을 대량 매도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하지만 이날 다우지수는 0.4% 남짓 떨어졌다. 금 값은 4.3%, 은 값은 6.9% 추락했다.

◆10년 만기 미 국채선물=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10년 만기 국채 를 바탕으로 거래되는 선물. 시장 금리뿐 아니라 주가, 금·은 값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 미 30년 만기 국채선물은 시장 수익률을 기준으로 계약이 체결되지만 10년 만기 국채선물은 국채 값을 기준으로 매매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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