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영상 만지면 근육이, 또 두드리면 혈관이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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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최원철 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와 학생 10여 명이 대형(가로 76㎝, 세로 213㎝) 전자 해부대 주위에 둘러서 있다. 80인치 LCD 화면에 어깨를 다친 여자 환자의 해부도가 뜬다. 실물 크기에 3D 입체영상이다. 아이패드(iPad)를 쓰듯 화면을 살짝 건드리자 어깨 부위가 순식간에 확대된다. 전후좌우 360도로 회전도 한다. 화면 한쪽을 살짝 두드리자 이번엔 근육과 뼈가 차례로 사라지고 뒤에 숨어 있던 혈관 다발이 드러난다.

 SF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지난해 5월, 이 학교 학보(‘Inside Stanford Medicine’)에 소개된 실제 수업 모습이다. 이 수업에 쓰인 ‘가상 해부대’는 실리콘밸리의 아나토마지(Anatomage)사가 개발한 테이블(table)이란 제품이다. 이 회사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최원철(미국명 잭 초이, 44) 박사는 29일(현지시간) 미국 롱비치에서 열리는 TED콘퍼런스에서 이 기술을 직접 소개할 예정이다. 리허설 준비로 바쁜 최 박사를 27일 콘퍼런스장에서 만났다.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와 학생들이 ‘테이블’을 이용해 해부학 수업을 하고 있다. 테이블은 CT·MRI 등 실제 환자의 의료 사진을 합성해 실물 크기의 입체 이미지로 보여주는 가상 해부대다. [아나토마지 제공]

 -가상 해부대를 개발한 이유는.

 “해부학은 의사들에게 꼭 필요한 학문이다. 하지만 카데바(cadaver, 연구용 시체) 구하는 게 쉽지 않다. 구매는 불법이고 기증을 받아야 한다. 미국에선 시신 기증 프로그램과 해부학교실을 운영하는 데 연간 50만~100만 달러가 든다. 종교적인 이유로 시체 해부를 금지하는 나라도 있다고 들었다. 테이블(대당 6만 달러)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른 디지털 해부 프로그램과의 차이는.

 “컴퓨터단층촬영(CT)·자기공명영상촬영(MRI) 등 실제 환자의 이미지를 사용해 1대1 사이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너무 리얼해 TED 관객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 그래도 ‘진짜’만은 못하지 않을까.

 “진짜보다 나은 점도 있다. 시체는 화학처리를 아무리 잘해도 변형·변색된다. 교통사고 시체는 장기 등이 훼손돼 있다. 반면에 ‘테이블’은 완벽한 상태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해부학은 외과의사가 될 사람만 배우는 게 아니다. 가령 치의학·간호학과 학생들에겐 진짜 시체보다 테이블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3D이미지 기술은 여러 분야에 쓰인다. 의료기기 전문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한 곳이 의료기기 회사였다. 집안에 의사가 많은 영향도 있을 거다.”

손가락 하나로 자유롭게 확대·축소와 회전·절개 등이 가능하다. [아나토마지 제공]

 최 박사의 부친은 부산백병원 초대 원장을 지낸 고 최하진 박사다. 두 형과 동생도 한국과 미국에서 의사로 일한다. 최 박사는 서울대 기계공학과(86학번)를 졸업하고,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컴퓨터설계(CAD)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사나 교수가 될 생각은 안 해봤나.

 “내게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난 창업을 원했다. 유학 시절, 김종훈 전 유리시스템즈 대표(현 벨연구소 사장)가 벤처 기업가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TED=기술(Technology)·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디자인(Design)의 머리글자. 매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콘퍼런스가 열린다. 첨단 기술과 지적 유희, 예술과 디자인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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