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세계 3위 일본 엘피다 파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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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위 D램 제조업체 일본 엘피다가 자금난에 몰린 끝에 일본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엘피다는 27일 오후 도쿄증권거래소 보고를 통해 “일본 정부와 채권은행의 추가 자금지원을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엘피다는 다음달 22일에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150억 엔을, 4월 2일에는 은행 대출금 770억 엔을 갚아야 한다. 그러나 벌어 놓은 현금이 없는 데다 추가 자금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부도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결국 경영진은 부도를 피하기 위해 도쿄지방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 것이다. 올 1월 말 현재 엘피다의 빚은 4800억 엔(약 6조6200억원)에 이른다.

사카모토 유키오 엘피다 사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데 대해 깊이 사죄한다”며 “회사를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해 사임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현 단계에서 감원 등 구조조정은 고려하고 있지 않으며, 히로시마 사업장은 정상적으로 가동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엘피다는 1999년 NEC와 후지쓰의 D램 부문이 합쳐져 탄생했다. 이후 한국의 삼성전자·하이닉스, 일본 도시바, 독일 인피니온, 미국 마이크론과 함께 반도체 업계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다 2007년 ‘치킨게임’이 벌어지면서 회사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 결과 엘피다는 2007년과 2008년을 통틀어 2000억 엔이 넘는 적자를 냈다. 급기야 일본 정부는 2009년 300억 엔의 공적자금을 지원했다. 일본 은행 채권단도 긴급자금 1000억 엔을 빌려줬다.

 엘피다는 2010년 반짝 호황 덕에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봄은 길지 않았다. 그해 5월 2.72달러이던 DDR3 1기가비트(Gb) D램 가격은 최근 0.5달러 수준까지 곤두박질쳤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D램 업체들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여기에 엔고까지 겹쳤다. 결국 엘피다는 최근 5분기 연속 대규모 적자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 부채 상환 만기에 몰리자 결국 손을 든 것이다.

 엘피다의 파산신청은 일단 국내 업체에 호재다. 당장 생산라인을 멈추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생산을 할 수 없어 D램 분야의 고질적인 공급 과잉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영증권 이승우 연구원은 “단기적으로는 엘피다가 현금 확보를 위한 밀어내기 출하를 해 시장이 출렁일 수는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D램 산업 전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업체들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익명을 원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현재 50%에 육박하는 점유율이 높아진들 좋을 건 없다. 오히려 독과점 이슈가 불거지고, 그로 인한 규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강남규·박현영 기자

◆치킨게임=두 대의 자동차가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다 먼저 운전대를 돌린 사람이 지는 게임. 패자를 ‘겁쟁이(치킨)’라고 놀린 데서 비롯됐다. 1960년대 미국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상대가 손을 들 때까지 적자를 감수하고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반도체 업체들의 경쟁을 흔히 치킨게임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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