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제 대학 사격부 첫 여성 사령탑, 상명대 전정희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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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과 사랑에 빠진 노처녀’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상명대학교 사격부 전정희 감독. 40개가 넘는 국내 4년제 대학 사격부 중 최초로 여성 감독이 된 전 감독은 세계 최고의 선수를 양성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최진섭 기자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 사격 클레이 부문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전정희씨가 상명대학교 사격부 신임 감독으로 선임됐다. [사진=상명대 제공]

4년제 대학 사격부 사상 첫 여성 감독이 탄생해 한국 사격계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3월 창단하는 상명대학교 사격부 감독에 전 국가대표 출신 전정희(45)씨가 신임 감독으로 선임된 것. 한때 클라이 부문 한국신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던 전 감독은 사격 입문부터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고등학교때부터 엘리트 체육을 시작하는 스포츠 선수들과는 달리 전 감독은 2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사격에 입문했다. 어린 시절 강원도 철원하고도 휴전선 인근의 시골 마을에 살았던 전 감독은 매일 전차나 장갑차, 군인을 보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덕분에 전 감독은 총이 무섭기보다는 총을 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마음 한 켠에 자리잡게 됐다. 학창시절에도 또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컸던 전 감독은 타고난 신체조건 때문에 배구·농구·육상 등 운동 선수를 하라는 유혹이 많았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거친 운동보다는 여성스러워지고 싶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운동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대학 진학도 미술 전공을 선택했지만 번번이 떨어졌고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정보처리를 배우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했던 전 감독은 의욕적으로 배움을 이어갈 수 없었고 그럴때마다 유년시절 품었던 사격에 대한 열망이 솟구쳤다. 전 감독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생각에 1992년 26살의 늦은 나이에 ‘사격’이라는 꿈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114 안내전화로 시작한 사격과의 인연

전정희 감독

“여보세요. 제가 사격을 배우고 싶은데요.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요?” 전 감독의 시작은 ‘황당’ 그 자체였다.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긴 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될지 몰랐던 전 감독은 무작정 114 안내로 전화를 걸어 사격을 배울 수 있는 곳을 물었다. 전 감독은 114 안내를 통해 대한사격연맹 연락처를 알아냈고 그 곳에서 아마추어가 사격을 배우려면 한국사격중앙연합회로 찾아가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

 무작정 안내 받은 대로 한국사격중앙연합회를 방문한 전 감독은 당시 외환은행 감독이었던 송주채씨를 만나 처음 사격과 인연을 맺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 없는 행동이었어요. 하지만 막상 꿈을 향해 도전하고 보니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송주채 감독님을 비롯해 당시 사격중앙연합회 회장이었던 송재희 회장님과, 상업은행 감독이었던 김철훈 전무님 등도 그때 알게 된 분들 입니다.”

 사격 선수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만 있었지 ‘총’ 한번 제대로 만져보지 못했던 전 감독은 한국사격중앙연합회 클레이 사격장에서 처음으로 공기소총을 쏴 5발 중 3발을 명중시키는 놀라운 실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사격에 입문은 했지만 체계적으로 훈련 받은 선수들의 기량은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전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습 뿐. 송재호 회장에게 빌린 경기용 엽총으로 끊임없이 견창 연습을 했다. ‘꿈 꾸는 자 반드시 꿈을 이룬다’고 했던가. 전 감독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1997년 전 감독은 자신의 첫 공식대회였던 ‘대한사격연맹 주최 회장기 사격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첫 공식대회에서 실력을 인정 받게된 전 감독은 고향인 강원도 철원군 대표 선수가 됐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는 꿈에 그리던 클레이(트랩) 부문 사격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특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한국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한국 사격계의 기대주로 성장했다. 이후에도 전 감독은 여러 실업팀에서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며 수많은 메달을 목에 걸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체육학 박사 과정 중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까지 되고 수많은 메달도 땄지만 전 감독은 늘 무언가 아쉬움을 느끼며 지내야 했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전 감독은 꿈은 이뤘지만 또다른 열정이 자신 안에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했다.

2002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한 전 감독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고려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일반대학원에서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고려대 일반대학원 체육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때 아나운서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학력 때문인지 마지막 심사에서 떨어졌어요. 그때 느꼈죠.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사는 것도 좋지만 이 사회에서는 남들만큼 학력도 중요하다는 걸요.” 전 감독의 꿈은 항상 진행형이다. ‘매사 긍정적으로 살자’는 자신만의 철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전 감독은 이제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상명대를 국가대표 산실로 만드는 게 꿈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뤄왔던 전 감독은 이제 후배양성을 위해 매진한다는 계획이다. 3월 6일 창단되는 상명대 사격부의 첫 사령관을 맡게 된 전 감독은 국내를 넘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훌륭한 사격 선수를 배출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국내 선수들과 겨뤄 이겨야 하는 것이 과제였다면 전 결코 상명대 감독으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가르치는 선수들의 목표는 올림픽 입니다. 국내 대학·일반 선수들을 이기는 것으로 시작하겠지만 결국 목표점은 올림픽 금메달입니다. 여자 사격선수로 지내는 동안 많은 심적 고통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험난한 가시밭길을 지나왔지만 앞으로 여자 감독이라는 것이 또다시 비아냥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4년제 대학 첫 여성 감독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세계 최고의 사격 선수를 육성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자신을 ‘사격과 사랑에 빠진 노처녀’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전 감독. 전 감독의 다부진 각오가 상명대 사격부의 미래를 밝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클레이=사격 경기의 하나. 클레이 피전이라고 하는 점토로 구운 접시 꼴의 표적을 공중에 쏘아 올린 후 총으로 맞추는 운동 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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