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대기업 출신 몰린 마트 계산대 근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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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50대 중반 퇴직 후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이른바 ‘소득의 크레바스’를 메우는 것이 그렇게도 절실했을까. 롯데마트가 만 56~60세를 계산원 등으로 채용하는 ‘시니어 직원’ 공모에 대기업 중견 간부 출신이나 석·박사 같은 이른바 ‘고(高)스펙’ 지원자들이 대거 몰렸다.

 롯데마트는 이달 1~10일 시니어 직원 응모를 한 결과 400명 모집에 2670명이 지원해 경쟁률 6.7대 1을 기록했다고 23일 밝혔다. 지원자 중 대기업 임원 출신이 10여 명이고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중견 간부 퇴직자는 400여 명이다. 은행 지점장을 지낸 지원자도 있다. 또 박사가 2명, 석사가 71명에 달했다.

 시니어 채용에 지원한 L씨(57·경기도 광명시)는 “대학 4학년인 둘째 아들 등록금에 보태고, 또 일을 해야 건강하게 살 것 같아 신청했다”고 말했다. 그는 연세대 보건학 석사 출신으로 2004년 LG생활건강에서 부장으로 명예퇴직한 뒤 광명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했다. 그러다 인근에 대형마트와 아웃렛·기업형수퍼마켓(SSM)이 들어오면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지난해 말 문을 닫고 롯데마트 시니어 직원에 응모했다.

 매장 계산원 같은 단순 업무에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의 고급 은퇴자들이 몰리는 것에 대해 한국노동연구원 방하남 박사는 “이른바 ‘소득 크레바스’를 메우려는 것이 한 이유”라고 분석했다. 직장 퇴직자들의 대부분이 돈을 더 벌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최근 청년 취업난 때문에 자녀들이 취직을 못 한 경우가 많아 더욱 그렇다. 하지만 쏟아지는 베이비부머 세대 퇴직자들을 수용할 만큼 일자리는 넉넉지 않다. 자영업자가 넘쳐 개업을 하기도 만만치 않다. 국민연금은 61세나 돼야 나온다. 그러다 보니 돈벌이가 절실한 은퇴자들이 일자리를 가리지 않고 지원한다는 설명이다.

 방 박사는 고스펙자들이 단순 업무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또 다른 요인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황폐해질 것이란 두려움’을 들었다. 실제 직장에서 1차 퇴직을 한 뒤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가족 관계에 금이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롯데마트와 비슷한 ‘시니어 스태프’제를 운용하고 있는 보광훼미리마트에도 고스펙자들이 많이 지원하고 있다. 보광훼미리마트 정준흠 영업기획팀장은 “지난해 100명을 뽑는데 10배가량이 왔다”며 “상당수가 기업체 간부 출신이고, 임원을 지낸 이들도 간혹 있다”고 전했다. 보광훼미리마트의 시니어 스태프는 60세 이상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일을 한다. 지난해 100명을 뽑았고 올해는 25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황수경 박사는 “롯데마트가 56~60세 은퇴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아주 훌륭한 사회공헌”이라며 “다른 기업들이 여기에 동참하면 은퇴자의 일자리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롯데마트의 시니어 직원들은 각 점포에서 계산과 온라인 쇼핑 주문품의 배송 준비(온라인 피커) 같은 일을 한다. 하루 6시간 이하, 1주일에 최대 30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롯데마트는 임금은 공개하지 않았다. 61세까지 일할 수 있으며 이후엔 건강에 문제가 없을 경우 매장 안내 아르바이트 사원으로 일하게 한다는 게 롯데마트의 방침이다.

 롯데마트는 서류전형과 면접을 거쳐 이달 말까지 시니어 사원 1차 선발을 완료하고 다음 달 초 매장에 배치할 계획이다. 또 5월에 400명, 하반기에 200명을 뽑는 등 올해 시니어 직원 총 1000명을 뽑기로 했다.

◆소득 크레바스=직장에서 은퇴한 뒤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의 소득 공백기를 일컫는다. 현재 일반 직장인의 평균 퇴직 연령이 53세이고, 2013년부터 61세에 국민연금이 나오므로 평균 8년의 소득 크레바스가 있는 셈이다. 국민연금을 55세부터 앞당겨 받을 수는 있으나 받는 돈이 크게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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