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 유럽기행] 피렌체 - 우피치미술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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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로마시대에 게니우스(genius)라는 영(靈)이 있었다. 사람이나 건물 혹은 집단 따위를 지키거나 수행하는 영이었다.

이 영에 대한 관념이 발달하면서 게니우스는 개인의 운명과 함께 하는 수호천사, 혹은 인간의 다른 자아(another self) 로까지 여겨지게 됐다. 기독교의 수호성인 관념도 이 로마적 전통과 잇닿아 있다.

물론 이 '다른 자아'는 현실의 나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자아(higher self) 이고, 그만큼 생일 같은 날 특별히 경배해야 할 나만의 소중한 대상이었다.

이렇게 나를 수호해주고 나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나의 다른 자아가 단순한 수호 차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을 이끌어간다면? 나는 대단한 천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재라는 유럽어의 단어들(영어-genius, 독일어-Genie, 프랑스어-genie)에 게니우스의 자취가 또렷이 남아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면 서양문명에서는 언제부터 게니우스가 본격적으로 인간들의 삶을 앞장서 이끌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천재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을까. 바로 르네상스시대부터다.

르네상스는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와 같은 위대한 천재들을 낳은 시대로 유명하다. 그 이전까지 서양문명은 예술가들을 낮은 신분의 기능인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에 들어 과거 중세적 전통과는 철저히 구분되는, 그럴 수 없이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미술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진정 신이 내린 재능, 타고난 천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스케치나 드로잉이 이때부터 인기있는 수집품이 된 것도 이런 천재 개념의 등장 탓이 컸다.

가구공방이나 대장간에서 제품을 만든 뒤 기초도면을 버리듯 중세 때까지는 예술가들도 작품을 완성한 뒤 스케치나 드로잉을 버렸다.

그런 까닭에 서양미술사에서는 르네상스 이전에 제작된 스케치나 드로잉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꼼꼼한 완성작보다 스케치에 오히려 천재의 영감이 더 잘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 르네상스 사람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집했고 일반 기능인들과 달리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엄청나게 달라지게 됐다.

그 변화를 최선봉에서 주도한 도시가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인 만큼 피렌체는 천재들을 낳는 데도 단연 으뜸이었다.

앞서 언급한 다빈치·미켈란젤로 외에 조토·보티첼리 등 화가들, 미술 분야 밖의 단테·마키아벨리·갈릴레이 등 이 도시가 낳은 거인들은 일일이 헤아리기가 벅찰 정도다.

이렇게 예술가들을 천재로 떠받드는 도시에서 뛰어난 예인(藝人)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렌체를 걷는 것은 개인과 천재의 관념을 선진적으로 발달시켜 중세 이래 인간의 자의식을 최초로 고도화한, 진정한 '인간의 땅'을 걷는 것이다.

인간을 긍정하고 그 능력과 잠재력을 최대로 꽃피운 땅. 그래서 피렌체는 활짝 핀 '꽃의 도시'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라틴어 이름은 Florentia, 영어 이름은 Florence인데, 이는 꽃(Flor)이란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렇듯 중세의 검은 장막을 걷고 이제 막 천재의 시대가 동터올 무렵 그 시대의 인상을 선명하게 그린 화가의 한 사람이 보티첼리다.

그의 대표작 중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는 다 허물어져가는 마굿간을 배경으로 성가족과 동방박사, 그리고 수행원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은 당시 델 라마라고 하는 피렌체의 신흥부자가 보티첼리에게 요청해 그린 것이다.

델 라마는 피렌체의 최고 권력자인 메디치 가문 사람들을 동방박사로 그려넣어 메디치 가문에 아부하려고 그림을 주문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줌으로서 메디치 가문 사람들과의 친분을 대외적으로 과시, 나름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델 라마의 주문에 따라 메디치 가문 사람들을 모델로 한 부분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인물을 모델로 그린 부분이다. 그림 맨오른쪽의 황토색 옷을 입은 젊은 남자인데, 그는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화면 밖을 쏘아보고 있다. 바로 보티첼리 자신이다.

자화상을 그림에 그려넣은 화가.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림 안의 상황에 몰입돼 있는데 그만은 지금 관람객을 향해 또렷이 각성돼 있는 자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화가들이 일반적인 자화상을 그리는 일조차 드물었던 시절 보티첼리는 자신의 남다른 자의식을 이 예외적인 표현을 통해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이밖에 '비너스의 탄생' '봄' 등 보티첼리의 대표작과 미켈란젤로의 '도니 성가족', 다빈치의 '수태고지'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걸작들이 즐비하다.

미술을 통해 르네상스가 어떻게 꽃피고 전개됐는지를 보려면 우피치 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이 미술관은 원래 메디치 가문의 사무실이었다. 그래서 이름이 'Uffizi'(영어로 office) 다.

이제는 이 가문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한 유럽 최고의 미술관 가운데 하나가 돼 있다. 우리의 도시들은 언제 이런 세계적 천재들의 '백화제방'을 맛보고 이를 최고의 자랑거리로 내놓을 수 있을까.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빛은 그 도시가 낳은 이런 위대한 인물들이 아닐까. 피렌체뿐 아니라 유럽의 문화 도시들을 찾고 떠나올 때마다 나의 마음은 우리의 예술적 천재들에 대한 새삼스런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

관람 메모

▶주소 : Via della Ninna,5-5012 Firenze
▶전화 : 055-238-8651
▶개관 : 화-일요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토요일은 밤 10시까지)
▶휴관 : 월요일, 1월1일, 5월1일, 12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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