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회의장은 기소됐지만 진실은 안갯속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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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2008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 때 돈 봉투를 뿌린 혐의로 박희태 국회의장이 불구속 기소됐다. 박 후보 캠프 상황실장이었던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재정·조직 업무를 담당했던 조정만 국회의장 정책수석비서관도 불구속 기소됐다. 사건은 돈을 받았다가 돌려준 고승덕 의원의 폭로로 시작됐으며 47일 만에 수사가 마무리됐다. 앞서 안병용 서울 은평갑 당협위원장이 당시 구의원 5명에게 2000만원을 주면서 당원협의회(지구당) 사무국장들에게 50만원씩 전달하라고 지시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 수사는 오랫동안 만연된 ‘경선 자금살포’ 관행에 나름대로 충격을 주고 있다. 1960~70년대부터 정당 지도부 경선에서는 매수용 자금이 뿌려졌으나 한 번도 본격적으로 단죄된 적이 없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2년 3월 민주당 김근태 고문이 ‘경선 불법자금’을 폭로한 적이 있다. 그는 “2000년 8월 치러진 최고위원 경선 때 5억4000만원가량을 비용으로 썼는데 이 중 2억4000여만원은 선관위에 공식 등록하지 못한 사실상 불법 선거자금”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당내 경선에서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정치현실을 바꾸려 고해성사의 심정으로 자신의 잘못부터 털어놓았다고 밝혔다. 검찰은 그를 기소했는데 법원은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선고했다. 비슷하게 돈을 뿌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후보들과의 형평성을 법원은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러 관계자가 기소됐다. 더군다나 현직 국회의장이 기소되기는 역사상 처음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도 역시 전체 진실은 안갯속에 묻히고 있다. 고승덕 의원 측 관계자는 돈을 돌린 사람이 봉투 여러 개를 담아 들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런 증언과 당시 상황을 보면 박희태 후보 측에서 고 의원 한 사람에게만 돈을 주었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검찰은 증언과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추가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고 의원이 받은 300만원은 박 후보 돈이라는 게 확인됐지만 ‘당협 사무국장 배포용 2000만원’의 출처는 드러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민주당 경선의 돈봉투 의혹에 대해선 검찰은 아무런 단서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현직 국회의장 기소’라는 충격은 한국 정치에서 돈 선거를 추방하려는 오랜 노력에 또 하나의 중요한 자극제가 돼야 한다. 한국 사회에는 정치권뿐 아니라 교육감·종교 지도자·협회 회장 선거 등 상당수 선거에서 표 매수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여야가 모두 많은 지역구에서 국민참여경선을 실시하므로 돈봉투 우려는 더욱 크다. 이에 경각심을 높이는 데 이번 사건이 적극 활용돼야 한다. ‘오세훈’이라는 이름은 오세훈 법으로 기억되면서 ‘돈 안 쓰는 정치’에 기여했다. ‘박희태’라는 이름은 한국 정당 경선의 돈봉투 추방과 연결돼야 한다. 그것이 정치경력 24년 박희태 의장이 국민에게 남기는 씁쓸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