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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 데이에 떠난 ‘광화문 연가’ 그 사람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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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차준홍 기자]

10년 전쯤 국내 개봉한 일본 영화 한 편이 있다. 젊은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다. 영화의 배경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역 림보. 매주 월요일이면 이곳에 죽은 이들이 도착한다. 이승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을 지목하면 그 기억만을 지닌 채 다음 세계로 떠날 수 있다.

 “당신의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면접관의 물음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한때를 떠올린다. 누구도 엄청난 영광이나 성취의 순간을 말하지 않는다. 통학버스 창밖에서 불어오던 바람, 귀지를 파주는 어머니의 따뜻한 무릎 감촉, 좋아하는 청년과 나란히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기억. 영화를 보며 나도 내 행복의 순간을 꼽아봤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어느 봄날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학교 기숙사 중앙엔 작은 뜰이 있었다. 목련과 라일락, 벚꽃이 흐드러진 4월의 밤. 친구 무릎을 베고 누워 노래를 들었다. 핑크색 워크맨에 연결된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달큰한 바람에 흔들리는 흰 꽃잎을 보며, 말없이 오래도록 그저 들었다. 그때 분명 생각했었다. ‘이런 저녁, 두 번 다시 안 올지 몰라.’ 우리를 취하게 한 건 이문세 4집 ‘사랑이 지나가면’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그에 버금갈 만큼 충만한 시간이 없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그 밤 그 노래는 내가 아는 행복의 한 전형이 됐다. 14일 밸런타인 데이를 별생각 없이 보내다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렸다. 누군가 리트윗한 가수 이문세의 트위터 글 때문이었다. 그는 “오늘이 고 이영훈 작곡가의 추모일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맞다. 이문세 곡 대부분을 만든 이영훈은 4년 전 밸런타인 데이에 ‘림보’로 갔다. 그에게 청춘을 빚졌음을 고백하는 댓글이 많았다. “그 노래들로 10년은 버틴 것 같다” “그로 인해 지금껏, 앞으로도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이영훈의 곡은 풍경에 스며든다. 어떤 날 어떤 곳을 지나면 어김없이 그 노래가 생각난다. 때론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노래와 함께 흘러온 내 세월 때문이다. 그걸 가능케 한 건 이영훈 곡의 남다른 ‘격’이다. 넘치거나 강요하지 않는 담담함. 듣는 이에 대한 깊은 배려다.

 온갖 ‘데이’로 사랑을 확인하는 요즘이다. 한 조사 결과를 보니 이번 밸런타인 데이 때 대학생들이 준비한 선물의 평균값은 7만5000원이었단다. 남자가 바란 건 태블릿PC, 여자는 명품지갑. 한데 다들 알지 않는가, 그렇게 증명한 사랑 따위 얼마 못 가 잊힌다는 걸. 남는 건 외려 어떤 눈빛, 서툴지만 솔직한 고백, 맞잡은 손끝의 감촉. 우리 모두 언젠가 림보로 떠나는 날, 건져 올릴 단 하나의 기억이 되고 싶다면 사랑하는 그의 삶에 공기처럼 스미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이영훈의 노래처럼.

이나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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