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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39) 제일은행 <1> 뉴브리지의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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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울며 겨자 먹기로 국제 사회에 “팔겠다”고 약속한 제일은행. HSBC의 배짱 협상에 쩔쩔매던 정부 앞에 나타난 미국계 투자펀드 뉴브리지캐피털은 파격 제안을 한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왼쪽)이 1998년 12월 31일 제일은행 매각 발표 자리에서 뉴브리지 아시아 본부장인 웨이지안 샨을 소개하고 있다. [중앙포토]

웨이지안 샨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때 고비사막으로 하방(下放·농촌 추방)됐다던가. 배가 고파 인분을 씻어 남은 곡식 알갱이를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도미(渡美) 후 철저히 미국화한 듯했다. 화려한 학벌에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 내가 그를 만난 건 98년 12월 30일. 미국계 투자펀드 뉴브리지캐피털에 제일은행을 팔기로 확정한 날이었다. 그는 뉴브리지의 아시아 본부장이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이미 제일은행 매각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로 한 상황.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악수를 건네며 딱 한마디했다.

 “제일은행을 정상화시켜 주시오. 꼭 세계적인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해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무조건 해외 매각. 제일은행의 운명은 1년 전인 97년 12월 이미 결정돼 있었다. 외환위기가 본격화한 그해 말, 제일·서울은행은 뱅크런(대량 인출사태)으로 파산위기에 몰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두 은행을 폐쇄하라”고 정부를 몰아붙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약속을 하고 만다. “지금 두 은행을 청산하면 충격을 견딜 수 없다. 일단 공적자금으로 은행을 살리겠다. 그리고 해외에 팔겠다.” 12월 15일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가 이런 내용의 처리 방안을 발표한다. ‘98년 11월 15일’로 매각 시점까지 못 박았다.

 은행 매각. 아무리 잘해도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비싸게 팔면 ‘그 좋은 은행을 왜 팔았느냐’는 시비에, 반대 경우엔 ‘헐값 매각’ 시비에 시달릴 게 뻔했다. 매국노 소리나 안 들으면 천만다행일 것이었다. 이 골치 아픈 일이 금감위로 떨어진 건 98년 4월. “금융 구조조정은 금감위가 일괄적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IMF의 권고 때문이었다. 시한은 7개월밖에 안 남았을 때였다.

 시장은 썰렁했다. 도무지 사겠다는 이가 없었다. 모건스탠리를 앞세워 40여 곳의 외국 금융회사를 노크했다. 반응이 없었다. 그 와중에 씨티은행은 “제일은행 지점 중 괜찮은 것만 100개를 골라 인수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괜찮은 지점 100개를 팔아버리면 남은 건 누가 산단 말인가. 씨티로선 그럴 만도 했다. ‘한국의 위기는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다’는 시각이 우세할 때였다. 대기업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제일·서울은행의 부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불어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누가 그런 은행을 사려 들겠는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HSBC은행이 배짱을 부린 것도 그래서였다. HSBC는 빚잔치에라도 온 양 거드름을 부렸다. “나중에 자산이 부실해지면 되사주는 ‘풋백 옵션’을 걸어라” “지분은 우리가 100% 인수하겠다”고 요구했다.

 풋백 옵션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추후 부실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약속 없이 제일은행을 사갈 곳이 없다는 건 정부도 인정했다. 하지만 지분 문제는 달랐다. 파는 쪽이 향후 부실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했으면, 반대로 은행이 살아났을 때 얻을 이익도 같이 나눠야 했다. 이미 제일·서울은행 부실 청소에 5조5000억원을 집어넣은 상황. 지분을 가능한 한 많이 들고 있어야 은행이 좋아진 뒤 되팔아 공적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최소한 지분 40%는 가져야 한다”는 정부에 HSBC는 “20% 이상은 절대 못 준다”고 버텼다.

 뉴브리지가 등장한 건 바로 그때. HSBC와 실랑이가 한창이던 12월 11일이었다. 한양대 김지홍 교수를 통해 웨이지안 샨은 매각팀장인 진동수 금감위 제1심의관을 찾았다. 웨이지안 샨은 정부의 고민을 꿰고 있었다. “지분의 49%를 주겠다. 세계적인 경영자를 영입해 은행을 정상화시키겠다.” 한국 정부가 원하는 걸 정확히 짚어왔다.

 그러나 뉴브리지는 투자펀드다. 은행이 정상화되면 돈을 챙겨 떠날 게 뻔했다. 정부로선 어떻게든 HSBC와 계약하고 싶었다. ‘세계 최대 은행에 팔면 선진 경영 기법 도입과 국제 신인도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가 컸다. 하지만 HSBC는 완강했다. 막판에 “지분을 27.5%까지 주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뉴브리지와 격차가 컸다. 결국 98년 12월 31일 정부는 뉴브리지와 제일은행 매각 MOU를 체결한다. 불과 20일 만에 이뤄진 전격 결정이었다(HSBC는 이후 서울·외환은행 인수에도 나섰지만 모두 막판 무산됐다. 한국의 은행과는 애초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의 소문에 의하면 국내 소매금융도 매각하려 한다고 한다).

 MOU 체결은 큰 뉴스였다. ‘국내 은행 첫 해외 매각’. 신문마다 대문짝만 한 기사를 실었다. 매각이 완전히 끝난 듯한 분위기였다. 이제 막 MOU만 체결했을 뿐 본격 매각 협상은 지금부터인데 말이다. 실제 본계약 체결까지 1년이란 시간이 더 걸렸다.

 국내외 시장은 제일은행 매각을 반겼다. 국제사회는 이를 한국 금융 구조조정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MOU 체결 소식이 전해진 직후 “한국 신용등급을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두 달 뒤 한국 신용등급은 Ba1에서 Baa3로 한 단계 올라갔다. 신용등급 상승은 97년 외환위기 이래 처음이었다. 1년 전 투기등급으로 강등당했던 한국이 비로소 투자적격등급으로 복귀한 것이다.

만난 사람=이정재 경제부장, 정리=임미진 기자

등장인물
▶웨이지안 샨(Weijian Shan)

베이징 출신. 중국 문화혁명 당시 15세의 나이로 고비사막으로 하방됐고, 6년간 굶주림과 싸우며 고된 노동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혁명이 끝난 1975년, 베이징 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이후 도미해 샌프란시스코대 경영전문대학원(MBA)을 거쳐 UC 버클리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는다. 와튼스쿨에서 조교수로 일했고, JP 모건을 거쳐 뉴브리지캐피털(현 TPG 캐피털)의 파트너로 영입된다. 제일은행 외에 중국 선전개발은행, 대만 타이신 파이낸셜 등의 거래를 주도했다. 현재 사모펀드 PAG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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