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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노래를 마치자 보아가 말했다 “이 순간을 잊지 마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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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위적 구성이 거슬려서다. 흔히 ‘악마의 편집’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감동을 짜내고 노이즈 마케팅을 꾀한다. SBS ‘K팝스타’는 좀 다르다. 뒷사연보다 무대 자체에 집중한다. 심사위원들도 보다 냉정하고 전문적이다. 유사 프로그램들과 달리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는 여성 참가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이유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방송에선 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박진영의 JYP, 양현석의 YG, 보아의 SM엔터테인먼트에서 집중 트레이닝할 대상 6명씩을 골랐다. 패자부활전까지 거쳐 JYP와 YG는 주어진 카드들을 모두 썼다. 반면 가수 보아는 “억지로 뽑지 않겠다”며 1장을 포기했다. 클로징 멘트가 나가고 제작 스태프들이 무대를 정리하려는 순간 한 소녀가 손을 들었다. 이정미 양이었다. 열일곱 소녀는 주눅 든 얼굴로 보아가 든 카드 한 장을 쭈뼛쭈뼛 가리켰다. “저 카드 때문에,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노래 한 번 하고… 다시 한 번 생각을….”

 그렇게 시작된 노래는 절실했다. 이제껏 별로 눈에 안 띄던 친구였다. 몇 회째던가, 집단 따돌림으로 전학까지 가야 했던 사연이 잠깐 등장했었다. 그래서 더 소심하고 자신감 없어 뵈나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반주도 없이 혼신을 다한 노래가 끝나자 보아가 말했다.

 “모든 사람이 그냥 내려가려는 순간 손 들고 나와 노래를 했다는 게, 그런 정신이 필요한 거예요. 서바이벌이잖아요! 지금 손 들고 나온 이 순간을 잊지 마세요. 그런 의미로 여섯 번째 카드를 이정미 양에게 드리겠습니다.”

 어찌 보면 보아의 결정은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한다는 서바이벌의 취지에 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긴 아직 아마추어의 무대. 재능 못지않게 꼭 꿈을 이루고 말겠다는 절실함이 중요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아였기에 그 가치를 더욱 눈여겨본 것 아닐까. 열다섯 어린 나이에 생면부지 일본 땅에서 무서운 집념으로 대스타가 된 그녀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외운 한자가 ‘루(淚·눈물)’라고 했던가. 그러나 힘들 때마다 주저앉았다면 26세 나이에 이미 대가의 풍모를 갖춘 그녀를 우리는 지금 볼 수 없었을 게다.

 작고한 번역가 겸 소설가 이윤기 선생은 내 멘토셨다. 언젠가 “되는 일이 없다”며 푸념하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스파르타에 전해 오는 얘기야. 아들이 말했대. ‘어머니, 칼이 짧아 적을 찌를 수 없어요.’ 어머니가 답했지. ‘얘야, 한 발 더 다가가 찌르려무나.’ 그런 결기도 없다면 어찌 살겠어.”

 세상은 좌절을 권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엔 한 발 더 내디뎌 찌르는 사람이 있다. 여기가 끝인가 할 때 다시 몸 일으키는 치열함. 정미양의 용기에서, 보아의 선택에서 그 귀한 가르침을 다시 새긴다.

이나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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