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가짜 빈곤층' 판친다

중앙일보

입력

경기도 A시에 사는 金기섭(39.가명)씨는 지난 5월 동사무소에 최저생계비를 신청했다.

다음달 1일부터 시행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따라 정부가 주는 돈(4인 가구 기준 평균 월 93만원)을 타기 위해서다.

그가 신고한 소득은 헌 옷을 팔아 번다는 월 36만원. 그러나 그는 실은 핸드폰 대리점 사장이다. 중형 자가용도 굴린다. 金씨의 7세 된 딸이 사는 형편을 확인하러 온 사회복지사 崔모씨에게 해준 말이다.

복지사 崔씨는 "金씨가 다른 지역에 대리점을 차린 데다 승용차를 타인 명의로 등록해 서류상으로 밝혀낼 수 없었다" 며 "우연히 적발했지만, 교묘히 빠져나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 이라고 말했다.

시행을 불과 5일 앞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실상이다. 국가가 빈곤층에 최저생계를 보장한다는 이 제도에 '가짜 빈곤층' 이 끼어들고 있다.

가구당 소득을 낮추기 위해 가족들이 주소를 옮기는가 하면, 거짓으로 이혼서류를 꾸미는 사례마저 있다.

재산을 줄이려고 금융기관 예.적금을 해약하고, 뒤늦게 빚이 있다며 차용증서를 위조하는 '빚 부풀리기' 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의 박스 수집상 洪모(43)씨는 2천만원의 전세보증금을 전재산으로 신고한 생활보호대상자. 그러나 이번에 처음 금융기관 재산을 조회한 결과 1억원의 예금이 밝혀져 보호대상에서 탈락했다.

부모나 자식을 '가짜 빈곤층' 으로 만들기 위해 가족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위장하거나, 능력이 되는데도 부양을 기피하는 사례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사회복지사▶재산증명▶납세자료 등 소득.재산 파악을 위한 인프라는 충분치 않아 가짜 빈곤층 적발은 한계에 부닥쳐 있다.

사회복지사는 현재 4천8백명으로 정부 추산 필요인원(7천2백명)에 못미쳐 일손이 달린다.

국세청 납세자료는 2년 전인 1998년치여서 현실과 동떨어지는 데다 그나마 일용직.영세 자영업자의 소득 자료는 아예 없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자료를 통해 소득 파악이 가능한 경우는 전체 신청자의 50~60%선" 이라며 "사회복지사의 현장조사에 의존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실제 빈곤층 중에 일 안하고 놀면서 최저생계비나 타겠다는 '도덕적 해이' 현상도 싹트고 있다.

한양대 상경대 나성린 교수는 "선진국도 빈곤층에 최저생계비를 보장해 주는 경우는 드물다" 며 "현 제도는 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는 만큼 지급액을 낮췄다가 단계적으로 올리는 게 효과적" 이라고 주장했다.

생활보호비 지원 예산은 올해 1조7천2백78억원에서 내년엔 1조원 가량 더 늘게 돼 한쪽에선 우리 경제 수준에 이같은 부담이 적정하느냐는 논란이 법제정 때부터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기존 생활보호자 1백52만명과 신규 신청자 42만명 등 총 1백94만명 중에서 대상자 1백50만~1백60만명을 이달 말까지 선정할 계획이다.

기획취재팀=고현곤.이상렬.김현승.조민근.홍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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