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 전 아내가 쓴 회고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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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 Books 편집장

"별을 사랑하는 여자가 별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 별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별빛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만이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 그러나 남자가 사랑하는 별은 여자가 사랑하는 별과 달랐다. …… 우주 시원의 비밀이 남자의 불후의 천재성과 불굴의 의지 앞에서 한 꺼풀씩 베일을 벗을 때마다 여자의 별들은 차례로 빛을 잃어갔다."

남자는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고, 여자는 21살 때 스티븐 호킹과 결혼했고, 결혼 25주년 기념일 다음 날 호킹이 없는 집에서 쫓겨난 여인 제인 호킹이다. 제인 호킹이 스티븐 호킹과 보낸 지난 시절들의 기억들을 끄집어 내 한 권으로 묶어낸 회고록 〈스티븐 호킹, 천재와 보낸 25년〉(제인 호킹 지음, 정경호 옮김, 흥부네박 펴냄)이 한글로 옮겨져 나왔다. 재미 시인이자 번역가인 정경호 님이 책 뒤에 끼워 넣은 '옮긴이의 말'은 그 두 사람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책 446쪽)

스티븐 호킹에게 모터 뉴론 디지즈라는 특이한 질병의 증세가 처음 나타난 것은 열세 살 때 원인 모를 질병을 앓고 난 다음. 제인은 스티븐과의 결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스티븐의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물론 처음 결혼을 결정할 때에도 제인은 스티븐에게 심각한 질병이 있음을 알고는 있었다. "스티븐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는지 모르며, 결혼생활이 길지 않을 수 있다"는 스티븐의 아버지가 전해준 이야기를 가벼이 넘길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때 스티븐의 아버지는 스티븐의 질병이 유전적인 것이 아니니, 아이를 갖고 싶다면 안심하고 서두르라고 했다.

제인은 이 책의 머리글에서 자신의 딸이 "오만하고 단정치 못한 데다가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앓기 시작한 젊은이를 집에 데려 와서 그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솔직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학업에 대한 걱정과 함께 스티븐과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스티븐의 천재성은 이미 학부 연구생 시절부터 알려진 것이지만, 좋은 결혼 상대자는 아니었다. "강의실에 들어간 것은 손꼽을 정도였고, 그렇다고 따로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담당 교수의 눈앞에서 과제물을 북북 찢어 휴지통에 구겨넣고 나온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입에 올려지고"(이 책 18쪽) 있을 정도로 그의 괴팍한 행동에 주변의 눈길이 고울 리 없다.

그러나 제인은 "그가 지닌 풍부한 유머 감각과 독단적인 기질"에 마음이 이끌렸고, 그에 대한 주위의 혹평과, 심각한 질병을 알고 있다는 결정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결정하게 된다.

결혼 생활은 모두에게 그렇듯, 연애 감정의 환상을 하나씩 깨뜨리며 두 사람의 평화를 지켜나가는 살얼음판. 제인은 스티븐과 결혼하고 곧 스티븐이 앓고 있는 질병의 "악마적 실체"를 깨닫게 된다. 절름거리는 걸음걸이 등의 행동의 부자유스러움과 균형감각의 상실은 겨우 맛보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모터 뉴런 디지즈 외에 스티븐과의 결혼 생활을 어렵게 한 또다른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고 제인은 돌아본다. "부부 사이에 불화의 씨앗을 심어주고 아내를 남편과 이간질시키는 교활하고 냉혹한 존재". 그것은 아인시타인의 첫 부인이 이혼의 매개자라고 불렀던 바로 그 물리학이었다. "물리학에만 집중되어야 할 과학자들의 정열을 결혼을 통해 분산시킨 대가를 물리학자의 아내들은 어떤 식으로든 지불"해야만 했다는 것. 그래서 물리학자의 아내들은 "모두 물리학에 온 정신을 빼앗긴 남편을 둔 실질적인 과부들"(이 책 83쪽)이었다고 제인은 썼다. 제인 역시 그들과 다를 게 하나 없었으며, 오히려 질병이라는 악마적 요인이 덧붙여져 더욱 혹독한 결혼생활을 해야 했다.

25년간의 험난했던 결혼 생활을 제인은 그러나 힘들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 생활 중에 스티븐의 육체적인 면에서는 날이 갈수록 퇴화하며, 그의 활동을 위해서는 제인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역할 비중이 점점 커졌으며, 그와 정반대로 스티븐이 물리학계에서 이루어내는 성과는 눈부셨다. 하나의 연구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제인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육체적 노고들을 제인은 이 책 안에 솔직하게 담아냈다.

능동적인 부부 관계를 맺기에는 근육이 너무나 무력했던 스티븐. 그와의 부부 관계에서는 늘 제인이 리드해야 했지만 "내 품 안에서 스티븐이 숨을 거두는 일이 생길까봐"(이 책 228쪽) 늘 두려워 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부부 관계에서 제인이 느껴야 했던 걱정과 불안감, 허무감 따위가 지배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마침내 스티븐의 사회 생활을 위해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부터 깨져나갔다. 스티븐은 자신을 하루 24시간 간호하겠다는 간호사 일레인 메이슨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됐다. 일레인 메이슨은 스티븐에게 컴퓨터 음성장치를 만들고 수리해 준 사람의 아내였으며,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또 제인은 교회 합창단 지휘자이자 딸 아이의 피아노 교습 선생이었던 조나단으로부터 인생의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됐다.

마침내 "25년 동안 블랙홀의 언저리를 떠돌며 살았다"는 제인은 결혼 생활을 파국에 이르게 된다. 제인은 스티븐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신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려할 일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의 삶을 전하고 싶은 생각에서 이 책을 썼다고 에필로그에 적었다. 또 이 책을 통해 스티븐과의 삶을 험난하게 했던 모터 뉴런 디지즈라는 근육 및 운동신경 무력증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때로는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제인 호킹과 관련된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독서의 속도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모터 뉴런 디지즈라는 특수한 질병을 앓으면서도 우주물리학의 성과들을 내놓기 위해 스티븐 호킹과 또 그와 가장 가까운 부인이 겪어야 했던 인간적 고뇌를 엿보는 데에는 흔치 않은 감동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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