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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기업 배싱 분위기에 … 1년 끈 ‘이익공유제’ 어정쩡한 봉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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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오른쪽)이 2일 강남 팔래스호텔에서 13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정 위원장은 “이익공유제 명칭을 협력이익배분제로 바꾸고, 기업의 자율에 따라 도입하도록 결정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마주보고 달리던 기차는 결국 충돌을 피했다. 정운찬(65) 동반성장위원장이 1년 넘게 주장해온 ‘이익공유제’가 논란 끝에 ‘협력이익배분제’로 이름을 바꿔 통과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2일 동반성장위원회의 결과에 대해 “경제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협력이익배분제를 통과시킨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다만 협력이익배분제·성과공유제·동반성장투자 중에서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한 것은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 문화 확산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앞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동 협력해 생긴 결과물을 공유하는 협력이익배분제가 기업 생태계에서 잘 정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동반성장위원회가 사회적 진통을 겪어 왔던 초과이익공유제를 ‘협력이익배분제’로 명칭을 변경해 도입하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며 “이번 합의를 통해 중기들이 키워놓은 인재들이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오롯이 중기의 기술경쟁력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밝혔다.

 ◆내년부터 이익배분제=합의안의 핵심은 ‘협력이익배분제’다. 이 제도는 대기업이 거둔 이익을 사전 약정에 따라 일부 우수 협력사와 나누는 것으로, 모든 협력사와 이익을 나누는 동반성장위의 첫 구상인 이익공유제에 비해 수혜 범위가 좁은 편이다. 동반성장위는 협력이익배분제 외에 성과공유제, 동반성장 투자 및 재원 마련도 가점 사항으로 분류해 가점을 준다. 가점 적용은 내년부터 하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대기업이 원자재가격 변동분을 얼마나 잘 반영해주는지, 계약 기간 중 부당하게 대금을 깎은 적은 없는지, 2∼3차 협력사까지 자금을 지원하는지는 올해부터 평가를 한다.

 동반성장위는 또 앞으로 대기업의 무분별한 중기 인력 스카우트를 막기 위해 같은 수의 대기업·중기·공익 대표로 인력스카우트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스카우트 문제를 둘러싼 대·중소기업 간 갈등을 심의하고 조정·중재하도록 했다. 대기업은 가능한 한 중기 인력을 끌어들이는 것을 자제하되, 불가피하게 채용할 경우 해당 중기의 인력 충원 방안을 함께 강구하도록 했다. 동반성장위는 대기업으로의 중기 전문인력 유출이 중기의 경쟁력을 해치고 대기업에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인식 아래 이런 결정을 했다. 앞으로 이 내용을 다듬어 동반성장지침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 합의=이날 13차 회의가 열리기 전의 11, 12차 회의에 대기업들은 참석을 보이콧했다. 대기업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논의가 흘러간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는 9명의 대기업 위원 중 강호문 삼성전자 부회장, 김준호 SK텔레콤 사장 등 6명이 참석했다. 최근의 ‘기업 배싱(bashing·때리기)’ 분위기에 몰려 대기업들이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최근에는 이른바 ‘대기업 빵집’ 논란으로 여론이 대기업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쪽으로 형성된 형국이다. 이 때문에 신라호텔과 현대자동차·두산그룹은 커피·베이커리 사업 철수를 선언했고, 독일산 프리미엄 물티슈를 수입해 롯데백화점에 공급하려던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손녀사위 양성욱(44)씨도 지난 1일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다.

 동반성장위 참석자들은 “대기업들이 고개를 숙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중기 대표로 참석한 이혜경 피엔알시스템즈 대표는 “회의 시작 전 대기업 쪽에서 먼저 ‘빵과 순대 같은 부분은 우리도 너무 한다고 생각한다. 협력이익 배분은 동감하니 혹시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은 빼고 갔으면 좋겠다’고 얘기해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합의를 끌어낸 요인은 따로 있다. 딱 집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두루뭉술하게 ‘이런 것을 해보자’는 식이어서 대기업들이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기업 대표로 참석한 한 인사는 “딱히 반대할 만한 내용도 없고 뭔가에 합의했다고 말하기도 어정쩡한 상태로, 일단 자율 합의에 의미를 둘 뿐이다”며 “이제부터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만들어가야 하는 초보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비교적 첨예한 대립을 보인 부분은 ‘협력이익배분제’로 할 것이냐 ‘협력이익계약배분제’로 할 것이냐였다. 후자는 ‘사전 계약이 있어야’ 이익을 나누는 것이고, 전자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익이 생기면 나누자는 것이다. 대기업들은 ‘계약’이란 단어를 넣자고 했지만 정 위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기업 쪽은 또 협력이익배분제를 ‘가점제’로 하는 것보다 ‘선택제’로 하자고 주장했다. 가점제는 강제성이 느껴져 대기업들이 ‘기업 배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부분은 ‘필수제’를 주장하는 중기 측과 중간지점을 찾아보자는 차원에서 결국 가점제로 낙찰됐다.

 동반성장위원인 경북대 이장우(경영학부) 교수는 “오늘은 어떻게든 결정을 보자는 마음을 갖고 회의에 임해 최대한 양보하며 합의점을 찾는 모습이었다”며 “전반적으로 대기업과 중기 간에 타협점을 찾는 모양새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측 대표인 이재광 광영전기 회장은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영업이익률이 10%대로 사상 최고인 대기업에 반해 이익률이 2%가 나올까 말까한 중기들은 직원 복지에도 신경 쓰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납품단가 연동제 등이 도입되지 않아 아쉽지만 양극화가 심하다는 걸 대기업에서도 인정했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이 ‘기업 배싱’이라는 압박 분위기에 백기를 든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대기업이 동반성장에 관심이 없다는 부분은 대기업에도 부담이 되는 만큼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쪽으로 전향한 것”이라며 “동반성장의 취지를 훼손시키면 안 된다는 취지에서 일단 논의를 하고 기대를 하자는 쪽으로 전향했다”고 밝혔다.

심재우·박현영·심서현 기자

기업 배싱(bashing)

최근 고조되고 있는 ‘기업 때리기’ 흐름을 일컫는다. 이른바 ‘재벌세’ 신설을 추진하는 등 정치권에서 기업을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이런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배싱(bashing)’의 사전적 정의는 ‘맹비난’ ‘강타’ 다. 대상은 다르지만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배싱’이란 말을 썼다. 지난달 국정연설에서 “교사들을 ‘맹비난(bashing)’하기보다 양질의 교사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학교를 지원하자”고 제안했다. 1980년대 초 미국과 일본 간에 무역 분쟁이 심해졌을 때는 미국에서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가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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