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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월급밀린 회사 받아 50년후 英왕실 감동시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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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이 ‘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 공식 도자기로 선정된 접시를 안고 있다. 접시에는 400개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 박혀 있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59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릇회사를 물려받았다. 공장 직원 서른 명, 사무실 직원 한 명. 하지만 청년 김동수에겐 ‘보석 같은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지금은 막사발, 요강 단지를 만들고 있지만 언젠가는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만들었던 한국 도자기의 명성을 다시 한번 세계에 드높이고야 말겠다는 꿈. 그리고 그 꿈은 마침내 이뤄졌다.

2012년 영국 왕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기념 공식 자기 제작업체로 한국도자기를 선정했다. 웨지우드, 로열 코펜하겐 등 유럽의 유서 깊은 도자기 업체들을 물리치고 얻은 쾌거였다. 한국도자기 김동수(76) 회장의 ‘도자기에 바친 일생’을 f가 들어봤다.

주부들이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바로 그릇가게다. 살림이 손에 익을수록 예쁜 그릇에 대한 욕심은 커진다. 영국의 ‘포트메리온’과 ‘웨지우드’, 미국의 ‘레녹스’, 독일의 ‘빌레로이앤보흐’ 등 해외 브랜드 그릇이 주부의 로망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국산 그릇의 위상도 달라졌다. 그 중심엔 한국도자기가 있다.

2007년부터 출시된 ‘프라우나 주얼리’는 손으로 직접 한 알씩 붙인 크리스털 장식이 특징이다. 양끝에 있는 화병에는 각각 4000개의 크리스털이 박혀 있다. 1개의 가격은 2700만원이다.

 올해로 창립 69년을 맞는 한국도자기의 직원은 700명이다. 평균 연령 44세, 평균 근속연수 20년. 김동수(76) 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도자기는 사람의 손이 중요하다”며 “우리만큼 숙련된 장인이 많은 회사는 없다”고 했다. 한국도자기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같이 먹고 살아야 하는 가족”이라는 김 회장의 철학 때문이다. 한국도자기는 부채비율도 0%다. 1959년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업을 이어받고 ‘빚 없는 기쁨’을 위해 꼬박 10년이 걸렸던 기억 때문이다. 김 회장이 꾸었던 ‘보석 같은 도자기’의 꿈에는 이처럼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기업’이라는 경영철학이 함께했다.

대학 졸업하고 빚더미 그릇상점 물려받아

“아버님(한국도자기 창업주 김종호 전 회장)이 43년 충북 청주시 남주동 시장에 ‘삼광사’라는 그릇상점을 열었어요.” 김 회장은 12살 때부터 가게에 나와 점원 대신 그릇을 팔았다. 삼광사는 49년 사기그릇 공장을 인수하면서 ‘충북제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 회장이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59년, 충북제도사는 빚더미에 몰려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아버지는 제가 쓰러져 가는 회사를 살리길 원했죠.”

 출근을 해보니 사무실 직원이라곤 달랑 여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30여 명 남짓한 공장 직원들도 월급이 3개월이나 밀린 터라 사장의 젊은 아들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솔선수범밖에 길이 없었다. 장작불로 가마에 불을 붙여 사기그릇을 굽던 시절, 공장에서 제일 힘든 일은 손으로 흙 반죽을 개는 일과 그릇을 포장할 짚을 꼬는 일이었다. 김 회장이 이 일들을 맡아 했다. 화장실 청소도 그의 몫이었다. 삐딱했던 직원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직원들에게 사정했죠. 밀린 월급은 앞으로 조금씩 나누어 갚겠다. 대신 이번 달 월급부터는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때 지급할 테니 나를 믿어달라.” 김 회장은 약속을 지켰다. 월급 줄 돈이 없을 때는 월 10% 이자를 얻어서라도 월급을 거른 적이 없다. “매일 밤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이 약속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제 영혼을 가져가셔도 좋다고.” 직원들의 신용이 쌓여가면서 공장도 활기를 띠었다. 그릇 판매도 늘었다. 빚을 다 청산하기까지는 꼭 10년이 걸렸다.

출장길서 본 우유 빛깔 본차이나에 눈이 번쩍

70년대 초 떠난 호주 출장길에서 김 회장은 ‘꿈같은 도자기’를 만났다. 영국 왕실의 자랑인 ‘본차이나’였다. “우유 빛깔처럼 하얗고 손가락으로 튕기면 맑은 종소리가 나는데 눈이 번쩍 띄었죠.” 출장비에서 점심값을 아껴(당시 본차이나 가격은 일반 도자기보다 스무 배나 비쌌다) 본차이나 찻잔 한 세트를 사왔다. 그것을 가지고 일본 나고야에 있는 노리다케 연구소를 찾아갔다. 노리다케는 이제 막 본차이나 제조를 시작한 때였다. 일본어와 영어를 섞은 대화로 ‘젖소뼈를 태운 재가 50% 함유된 도자기’라는 걸 알았다. 귀국한 김 회장은 동생 김성수(64) 젠한국 대표와 함께 시내 설렁탕 집을 돌며 소뼈를 얻어다 도자기를 만들었다. “1000개를 만들면 겨우 10개를 살릴 수 있을 만큼 실패의 연속이었죠.”

 김 회장이 본차이나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때,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가 도자기 업계 대표들을 초대했다. “당시 청와대에서 사용하는 그릇은 일본산이었어요. 독일 방문길에서 본차이나 찻잔을 선물받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 여사가 ‘우린 이런 품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 수 없느냐’고 했죠.” 함께 간 이들 중에 본차이나라는 도자기를 아는 이는 김 회장뿐이었다. “이미 연구 중이라고, 한 번 만들어 보겠다 했어요.” 하지만 당시 기술로 청와대 식기 전체를 만드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수천 개의 실패 끝에 대통령 부부가 쓸 수 있는 찻잔 세트 몇 개를 만들어 선물했다.

 “그때부터 청와대 식기를 우리가 납품하기 시작했죠. 당시 그릇에 들어간 무늬는 육 여사가 직접 제안한 것이었어요. 여사의 모교 배화여고 배지에 새겨진 방울꽃 문양이었죠.” 김 회장은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부탁으로 식판 모양의 접시를 만든 것도 기억난다”며 “막걸리를 좋아한 박 대통령을 위해 도자기 병과 여러 가지 안주를 조금씩 담을 만한 완두콩 콩깍지 모양의 안주접시도 만들었다”고 했다. 한국도자기는 3공화국부터 지금까지 청와대 식기를 만들고 있다.

크리스털 박은 프라우나로 보석도자기 꿈 이뤄

지난해 영국 왕실이 선정한 ‘다이아몬드 주빌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공식 도자기 중 보석함이다.

“청와대 식기를 납품하면서 한국 내 기반은 확실해졌지만 외국에서의 상황은 형편없었죠.” 77년 처음 참가한 미국 애틀랜타 도자기 박람회. 한국도자기는 참가 기자들이 꼽는 ‘도자기 순위’에서 200개 브랜드 중 꼴찌를 했다. “미국이나 유럽 진출은 넘기 어려운 산이었어요. ‘메이드 인 한국’이라고 얕잡아 봤으니까요. ‘너희 박물관에 있는 조선백자·고려청자를 만든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용없더라고요.”

 김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기술력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순수 국내 기술의 본차이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88년부터는 3년간 20억원을 투자해 젖소뼈가 함유된 특수 초강자기 ‘화인차이나’ 개발에도 성공했다. 화인차이나는 일반 도자기보다 강도가 2~3배 강하고 가격은 본차이나보다 20~30% 저렴한 실용 자기다. 본차이나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수출하는 길이 열렸다.

 김 회장은 자신의 도자기 인생 중 가장 기뻤던 일은 “2010년 4월 영국 런던의 해러즈 백화점에 입점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도 본차이나를 만들 수 있다고 했을 때 콧방귀 뀌던 영국의 심장부, 그것도 명품들만 있다는 해러즈 백화점에 입점했다는 건 이제 세계가 한국도자기를 인정한다는 증거였다. 요즘은 러시아와 중동의 왕실도 한국도자기의 고객이다. 한번에 7000만원어치씩 사가는 큰손들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주방용품 박람회 ‘암비엔테 쇼’에서도 한국도자기는 10번 홀에 부스를 차린다. 웨지우드, 로열 코펜하겐, 노리다케 같은 명품 브랜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다. 지난해 12월 영국 왕실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기념 공식 업체로 선정된 것 역시 한국도자기가 이뤄낸 쾌거다.

 “‘보석 같은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이뤄진 거죠.” 한국도자기는 2007년부터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박은 보석 도자기 ‘프라우나 주얼리’를 생산하고 있다. “본차이나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지구상에 없는 제품’을 고민했고 ‘보석 같은 도자기’라는 오래된 꿈에서 그 해답을 찾았죠.”

이달 독일 박람회에 사군자 접시 선보일 것

중동의 왕실로 납품하는 주전자와 커피잔 세트다. 빨강·초록·금색과 화려한 보석 장식을 유난히 선호하는 게 중동 고객들의 특징이다.

김 회장은 “도자기에 관해선 내가 최고”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재료는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관여하는 그다. 세계의 박물관·미술관 등에서 찾아낸 예쁜 그림을 디자인팀에 갖다 주는 것은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회사에서 만든 그릇을 집에서 직접 써보고 장단점을 찾아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한국도자기가 앞으로 200년 이상 꾸준히 존재하는 것, 그게 김 회장이 새로 꾸는 꿈이다. “유럽의 유서 깊은 도자기들에 우리가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래된 역사가 없어서예요.” 슬하의 2남1녀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김 회장은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첫째,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것. 둘째, 빌딩 세를 받아 놀고먹으며 사는 것. 셋째, 가업을 잇는 것. 김 회장의 질문은 한 달 뒤, 석 달 뒤, 1년 뒤, 3년 뒤에도 거듭됐다. “단단한 각오를 확인하고 싶었죠. 다행히 아이들이 내 뜻을 잘 따라주고 있어요.” 장남 영신씨는 현재 한국도자기 사장을, 차남 영목씨는 부사장 겸 ‘한국리빙’ 대표를 맡고 있다. 딸 영은씨는 한국도자기 전시장 총괄책임을 맡고 있다. “손자들도 경영과 예술을 공부하고 있어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도자기에 붙이는 특허기술은 사위(한양대 신소재공학부 윤종승 교수)의 아이디어였죠.” 김 회장은 “이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끝난 것 아니냐”며 웃었다.

 한국도자기는 이달 10~1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비엔테 박람회에 참가한다. 이번 전시 제품 중에는 ‘사군자’를 무늬로 한 독특한 접시들이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 기술로 유럽의 기를 꺾었다면 이젠 한국의 미를 자랑할 차례죠.”

1 육영수 여사가 사용했던 그릇 세트에는 초록빛 방울꽃이 그려져 있다. 김동수 회장은 “당시 고교생이었던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그릇 무늬를 만드는 데 아이디어를 냈다”며 “‘어머니의 그릇’을 잊지 못하고 있을 박 위원장에게 2004년 회사가 보관하고 있던 식기세트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4개의 구역으로 나뉜 식판 접시(오른쪽).

2 화사한 디자인을 선호했던 이순자 여사는 선홍빛이 선명한 철쭉꽃 사진을 보내 그릇에 담아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에는 전사(도자기에 사진이나 그림을 프린트하는 기술) 기법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릇 전면에 만개한 붉은 꽃송이들을 수놓은 그릇은 ‘희소가치’와 ‘화려함’ 등 모든 면에서 튀는 제품이었다고 한다.

3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지금까지 청와대에서 사용하고 있는 식기다. 초록·금색 테두리에 십장생을 그린 디자인은 김옥숙 여사가 선택한 것이다. 김 여사는 본사 직원을 직접 불러 원하는 무늬가 나올 때까지 확인할 만큼 그릇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손가락이 굵은 노 대통령을 위해 커피잔 손잡이를 굵게 만든 것도 김 여사의 제안이었다.

4 패션 디자이너인 고 앙드레 김과 한국도자기의 첫 번째 협업 작품인 ‘웨딩마치’ 시리즈다. 처음 출시된 2008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생산되고 있으며 특히 신혼부부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이 제품이 백화점에서 첫선을 보일 당시 앙드레 김은 그릇 무늬와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이 백화점 매장을 걸어 다니게 했다.

앙드레 김, 패션쇼 런웨이에 도자기 오르게 한 고마운 사람

한국도자기의 히트 제품 중 하나는 2008년부터 생산되고 있는 고(故) 앙드레 김과의 협업작이다. 김동수 회장은 당시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서실을 통해 돌려진 전화를 받았더니 어떤 남자가 자기가 앙드레 김이라는 거예요. 패션 디자이너가 왜 나한테 전화를 하겠어요. 목소리야 똑같았죠. 그래서 더 믿을 수 없었어요. 당시엔 앙드레 김 선생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게 유행이었으니까.” 당연히 장난전화라고 생각해 답도 않고 끊어버렸다. 두 번째 전화 역시 끊어버렸다. 세 번째 전화에선 전화기 속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일단 강남 신사동 ○○번지로 와 보세요”라고 말한 후 먼저 끊었다. “그제야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죠.” 부랴부랴 달려간 신사동 부티크. 앙드레 김은 “내 옷의 무늬를 넣은 그릇을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탄생한 첫 제품이 지금도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웨딩마치’다.

2010년 신세계백화점 80주년 패션쇼에서 김동수 회장과 앙드레 김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이날 패션쇼에선 모델들이 새로운 협업작인 ‘앵무’ 시리즈를 손에 들고 무대를 걸었다.

 김 회장은 “내가 기억하는 앙드레 김 선생은 참 열정적이고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고 했다. “자신의 그릇이 소개되는 자리가 아니어도 한국도자기의 행사라고 초대하면 어김없이 와줬어요. 마트 행사까지 올 정도였죠.” 2010년 신세계백화점 80주년 기념행사 때의 고마움은 더욱 잊지 못한다. “선생과 협업한 제품 ‘앵무새’ 시리즈가 막 출시됐을 때라 혹시 이 그릇을 패션쇼 무대에서 잠깐 소개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모델들에게 아예 그릇을 들고 걷게 했어요.” 김 회장은 “그렇게 고마운 사람과 밥을 한 끼도 못 먹어본 게 아쉽다”고 말했다. “늘 하얀색 옷을 입고 있어서 외부 사람들과는 식사를 거의 안 한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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