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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스타열전 (33) - 버니 윌리엄스

중앙일보

입력

조 디마지오, 미키 맨틀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명예의 전당 헌액자, 뉴욕양키스의 전성시대를 이끈 강타자, 메이저리그 불세출의 영웅, 모두가 정답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비에도 능한 선수였다는 사실,

그들은 공격력 못지않은 빼어난 수비를 자랑하며 드넓은 양키스구장 외야를 책임지며 위대한 양키스 중견수 신화를 만들어 낸 인물들이다.

현재 뉴욕 양키스의 중견수인 버니 윌리엄스도 그 화려한 양키스 중견수 계보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몇 안되는 유능한 선수이다.

1991년 메이저리그에 데뷰한 그는 올해로 빅리그 10년차를 맞는다. 그는 1995년 이후 단 한차례도 3할이하의 타율을 기록해 본적이 없는 정확한 타격과 1997년 이후 3년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빼어난 수비력을 가진 뉴욕 양키스의 보석같은 선수이다.

버니 윌리엄스는 푸르에르토리코에서 1968년 9월13일 태어났다. 어렸을때 그는 운동보다는 음악에 먼저 접하며 자랐다.

음악을 좋아했었던 부모들 밑에서 자란 그는 자연히 음악과 친숙해졌고 8살때 푸에르 토리코 민속곡을 연주할 정도로 기타연주에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음악적 소양은 그를 ‘산 후안’에 있는 음악 학교인 에스퀘라 리브레 드 뮤지카에 입학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가 속한 학년에서 가장 우수한 연주자로 수상받을 정도로 재능있는 클래식 기타리스트였다.

어려서 그는 클래식 기타 연주외에 육상 트랙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중미 주니어 올림픽 대회에서 200m, 400m와 2개의 계주에서 금메달을 딴 뛰어난 스프린터였었다.

그가 보여주는 광범위한 중견수비능력은 그의 이력과 관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메이저리그에 스카우트 되기전까지 버니는 푸에르 토리코의 미키 맨틀리그에서 야구를 했었다.

그곳에서의 그는 후안 곤잘레스나 이반 로드리게스처럼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선수는 아니였다.

또래의 후안 곤잘레스와 이반 로드리게즈가 어려서부터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에게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단 한명, 당시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로베르토 리베라는 달랐고 그의 눈은 정확했다. 리베라는 당시 양키스 마이너리그 사장이었던 덕 멜빈에게 전화를 걸며 그에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금 차세대 데이브 윈필드를 봤습니다. 지금 이리로 오셔야 겠어요."

그러나, 1985년 여름 당시 그의 나이는 16살이었고 메이저리그 규정상 17살이 될때까지 계약을 할 수 없었다. 양키스는 전도 유망한 어린 선수를 다른 팀에 빼앗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잠적시키는 묘안을 짜냈다. 그 묘안은 성공했고 1985년 9월13일 그의 17번째 생일날 그는 양키스구단과 1만 6천달러에 계약을 맺으며 프로선수의 길에 뛰어 들었다.

그의 첫 프로선수로의 시즌이었던 1986년, 그는 걸프 코스트 리그의 루키팀 사라소타에서 보냈다. 그는 이해 61경기에 출전 2할 7푼, 홈런 2개, 25타점과 도루 33개를 기록했고 득점 (45점), 토탈 챈스(123), 풋아웃(117)에서 걸프코스트 리그 선두를 달리며 프로선수 첫해에 양키스 팜의 유망주중 한명이 되었다.

또한 그는 외야수로서의 수비면에서도 그 기량을 인정받았고 그해 그는 걸프 코스트리그 올스타 팀에 선발되는 기쁨을 맛 보았다.

프로선수로서 2년째였던 1987년은 그에게 첫번째로 닥친 시련의 시기였다. 그해 그는 싱글A 포트 로더대일에서 부상으로 25경기밖에 뛰지 못했고 타율 1할 5푼 5리, 홈런 0개, 4타점을 기록하는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그는 어깨 부상으로 한달간을 벤치에 앉아있는 신세가 되었다.

부상 회복후 단기 리그팀 오내온타팀으로 내려간 그는 25경기에서 3할 4푼 4리, 15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기량을 회복했다. 그해 그는 로더대일과 오내온타에서의 50경기에서 18번 도루에 성공하며 빠른 발을 과시했다. 버니의 가능성을 알고 양키스는 그를 11월 8일 40명 로스터에 올리기도 했다.

1988년 캐롤라이나 리그 소속 싱글A 프린스 윌리암스로 팀을 옮긴 그는 92경기에서 3할 3푼 5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마이너 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그의 출장경기수가 적은 것은 7월 14일 하거스톤과의 경기에서 플라이 공을 잡기 위한 수비를 하다 외야펜스에 부딪혀 오른쪽 손목 골절상을 입으며 시즌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1989년 버니는 작년시즌 입었던 부상의 영향때문인지 시즌초반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1988년의 호조속에 트리플 A 콜럼버스에서 시즌을 시작한 그는 타율 2할 1푼 6리, 16타점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더블A 알바니팀으로 강등되었다. 알바니에서의 91경기에서 그는 2할 5푼 2리, 홈런 11개, 42타점을 거두었다.

1989년의 부진으로 인해 전체 시즌을 더블 A 알바니에서 보내게된 1990년, 그는 한때 야구를 포기하려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했고 비젼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키스 외야에는 릭키 헨더슨, 데이브드 윈필드, 클로델 워싱틴등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고, 트리플A에 콜럼버스 외야에도 제이 뷰너, 로베르토 켈리등 잘나가는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는 스위치 히터로서의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해 134경기에 출전해 2할 8푼 1리, 홈런 8개, 54타점을 기록하며 1989년의 부진에서 벗어났다.

이해 버니는 출장경기수, 타석수, 득점, 안타, 2루타, 사사구, 도루부문에서 팀내 선두를 달렸다. 그해 버니는 양키스 팜 전체 선수중 최고 유망선수(Top Prospects) 선정되기도 했다.

1991년 2년만에 트리플 A 콜럼버스로 돌아온 그는 콜럼버스에서 타율 2할 9푼 4리, 홈런 8개, 37타점을 기록하는 호조속에 트리플 A 올스타팀에 선발되었다.

7월 7일 버니는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발티모어와의 데뷰전에서 그는 팀이 5-3으로 뒤지고 있던 8회 중견수로 출장했고 9회에 그렉 올슨으로부터 메이저리그 첫 안타를 뽑아냈고 7월 14일 그의 첫 메이저리그 홈런을 캘리포니아 엔젤스의 척 핀리로부터 뽑아냈다.

스위치 타자인 그는 8월 28일에는 텍사스와의 경기에서 상대투수는 웨인 로젠달로부터 왼쪽타석에서의 첫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해 그는 로베르토 켈리의 부상으로 인해 양키스의 25명 선수명단에 올라 시즌 잔여 경기동안 중견수로 계속 출전했다. 그해 그는 양키스에서 85경기에 출전 2할 3푼 8리, 홈런 3개, 34 타점을 거두며 빅리그 첫해를 마쳤다.

1992년 그는 트리플 A와 뉴욕 양키스를 오가며 한시즌을 보냈다. 그는 트리플 A 콜럼버스 클리퍼스에서의 95경기동안 3할 6리, 홈런 8개, 50 타점, 20도루를 기록하며 인터내셔날 리그 장타율 4할 8푼 5리로 4위, 출루율과 타율에서 5위를 차지했다.

6월 5일 그는 트리플 A 톨레도와의 경기에서 양쪽타석에서 모두 홈런을 치는등 뛰어난 타격 재능으로 모든 스카우터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고, 이해 그는 다시 한번 최고 유망선수(Top Prospects) 선정되기도 했다.

이러던중 양키스 구단은 7월 31일 다시 그에게 메이저리그 복귀를 알렸다. 부상자 명단에 오른 대니 타타불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였고 버니는 8월 1일 토론토 전에서 선발출전했으며 시즌 나머지를 양키스 구단에서 보냈다.

양키스 복귀후 그는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20경기중 19 경기에서 안타를 쳤으며 이 기간 그의 타율은 3할 3리, 홈런은 1개, 11 타점을 기록했다.

그해 빅리그에서 그는 62경기에 2할8푼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해 겨울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벌어진 윈터볼에 참가했지만 부상으로 7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12월 19일 왼쪽 무릎 인대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의 첫번째 메이저리그 풀 시즌이었던 1993년 버니는 139 경기에 출장해 2할 6푼 8리, 홈런 12개, 68 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5월 13일부터 6월 7일까지 늑골 부상으로 인해 23 경기를 결장해야 했다.

그는 그해 139경기 모두 중견수로 활약했고 좌투수에게서 3할 2푼 5리, 홈런 7개, 29 타점을 뽑아내며 좌투수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6월 14일 보스톤의 투수 대니 다윈으로부터 생애 첫 그랜드 슬램을 기록하기도 했던 그는 8월 1일부터 8월23일까지 21경기 연속안타를 치며 1986년 돈 메팅리의 26경기 연속안타 이후 양키스선수로서는 최대 연속 안타기록을 작성했다.

붙박이 중견수로서의 두번째 해였던 1994 년 그는 104경기에 선발출장, 초반의 극심한 부진을 극복하고 2할8푼9리의 타율과 홈런12, 57타점을 기록하며 풀타임 메이저리거 2년째를 마쳤다.

그해 그는 텍사스전에서 좌타석에서 텍사스의 우완투수 더프 브럼리로부터 4회에 두 점 홈런을, 9회에 우타석에서 좌완 대런 올리버로부터 생애 2번째이자 알링턴구장에서 첫번째 만루홈을 기록하며 한경기 양쪽타석 홈런을 기록한 5번째 양키스선수가 되었다.

그전까지 한경기 양쪽타석 홈런기록을 보유한 양키스 선수로는 미키 맨틀(10번), 로이 화이트(5번), 톰 트레쉬(3번), 로이 스몰리(1번)가 있었다. 그의 기록은 1982년 로이 스몰리이후 양키스선수로서 12년에 나온 기록이었다.

점차 그의 타격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양키스의 다혈질 구단주 조지 스테인브레이너에게는 흡족하지 못한 성적이었다. 슬러거 외야수를 선호했었던 스테인브레이너에게 있어 당시 버니 윌리엄스의 12개의 홈런과 57타점은 너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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