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에는 없는 역사 속 한글 논쟁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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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한글 반포는 조선이 중화(中華)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임을 선언하는 일이다. 따라서 명(明)은 조선의 한글 창제와 활용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

SBS사극 <뿌리 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이다. 사극 속에서 세종과 젊은 집현전 학사들은 물론, 최만리 부제학이 이끄는 한글 반대파도 그렇게 여긴다. 등장 인물들은 또 한글이 새 질서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실용적인 지식이 경학(經學)을 밀어내는 데 촉매가 되리라고 본다.

이 같이 우려했기에 사극 속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 창제를 비밀리에 추진한다. 이를 눈치챈 반대파는 훈민정음 창제 프로젝트를 저지하려고 집현전 학사들을 잇따라 살해하며 세종까지 협박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특히 사극 중 일부는 사실의 뼈대에 상상력으로 살을 붙이는 대신 허구의 뼈대에 사실을 일부 붙인다. <뿌리 깊은 나무>도 예외가 아니다. 한글에 대한 반발은 강하지도, 지속되지도 않았다.

이는 우리 역사의 보고(寶庫)인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에서 ‘훈민정음’ ‘언문(諺文)’ ‘언서(諺書)’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한글 활용에 반대하는 주장은 단 한차례 제기된다. 바로 최만리 부제학 등이 올린 상소다. 상소의 주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상소는 ‘명(明)이 알고 노(怒)할까 두렵다’가 아니라 ‘명에서 혹시 비난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리 되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라고 우려한다.

한글은 명과 조선의 관계에 전혀 변수가 되지 않았다. 또 기존 통치이념이자 정치 언어이며 중심 학문이었던 유학(儒學)의 권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글은 조선시대에 공용(公用) 문자로 활용되지 않았다.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히 스며들었을 뿐이다.

한글을 둘러싼 논쟁은 뜻밖에 학술적인 부분에서 빚어졌다. ‘맞춤법 논쟁’이다. 세종은 재위 25년(1443년) 12월에 한글을 창제하고 ‘훈민정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후 집현전 학사들에게 한글의 자모를 만든 원리와 활용법을 정리하라고 지시해, 28년(1446년) 9월에 책 <훈민정음>이 완성됐다.

받침에 ‘ㅈ’ ‘ㅊ’ 등 쓰지 않기로

<훈민정음>은 ‘종성해(終聲解)’에서 ‘여덟 글자로 족히 쓸 수 있다(八字可足用)’고 규정한다. 받침으로는 자음 8가지, 즉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이어 ‘갗(가죽)’을 ‘갓’으로 쓰자고 예를 든다.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은 이 규정에 전적으로 따른다. 이 규정을 벗어나 책 전체에 ㅌ ㅊ ㅍ 등도 받침으로 쓴 것은 <용비어천가>과 <월인천강지곡>뿐이다. 이 두 책은 ‘심(深) 깊, 고(高) 높, 광(光) 빛, 개(個) 낱’ 등으로 표기했다.

<훈민정음>은 나라에서 냈다. 서문은 예조판서 정인지가 썼다. 국가가 정한 맞춤법의 권위에 도전한 자는 누구인가? 국어학자인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는 세종 외에는 그럴 인물이 없다고 추측한다. <용비어천가>는 1442년에 준비할 때부터 1445년 편찬돼 1447년 간행되기까지 세종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책이다. <월인천강지곡>은 1449년에 세종이 지은 책이다.

이 교수는 논문 <훈민정음 친제론>(1992)에서 “세종은 <훈민정음> 편찬에 관여한 신하들의 주장에 한 발 물러섰으나, 받침에 관한 자신의 이론이 옳음을 믿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다른 책과 달리 두 책이 명사와 동사의 어간을 분리해, 예를 들어 ‘눈에, 비늘을, 안아, 담아, 남아’로 쓴 점에 주목한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부분이 <월인천강지곡> 인쇄 후 제본되기 전 교정이다. 이 책에서 ㅅ 받침으로 인쇄된 부분이 단어의 뜻에 따라 ㅈ이나 ㅊ으로 고쳐졌다. 또 ㄷ은 ㅌ으로, ㅂ은 ㅍ으로 바로잡아졌다. 국어학자 안병희는 논문 <월인천강지곡의 교정에 대하여>(1991)에서 교정은 붓으로 고친 게 아니라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첫째 도장을 찍듯이 획을 추가했다. 둘째 인쇄된 글자를 물로 씻어내고 수정된 새 글자를 찍었다.

세조는 자신이 쓴 <석보상절>과 선왕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을 합쳐 <월인석보>를 1459년에 펴냈다. <월인석보> 중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앞의 교정을 충실히 따른다. 월인천강지곡의 교정이 세종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종성을 여덟 글자로만 쓴다는 규정은 최세진의 한자학습서 <훈몽자회>(1527년)을 통해 확산되며 한글 활용법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최세진은 한글 자모를 ‘초성종성통용팔자(初聲終聲通用八字)’와 ‘초성독용팔자(初聲獨用八字)’ ‘중성독용십일자(中聲獨用十一字)’로 구분하고 초성종성통용팔자로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을 들었다. 이 여덟 글자는 받침으로도 쓸 수 있다는 <훈민정음>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 교정의 비밀

최세진은 이 여덟 글자가 초성종성통용임을 보여주는 예로 글자마다 다음과 같이 두 자씩 한자를 열거했다. ㄱ 其 役, ㄴ 尼 隱, ㄷ 池○末, ㄹ 梨 乙…. 자음의 용례를 적은 이 부분은 언젠가부터 자음의 이름으로 쓰이게 됐다.

우리말 받침과 어간에 대한 세종의 생각은 400여 년간 묻혀있다가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낸 1906년에야 인정받는다. 주시경은 “맞춤법은 본음을 적어야 하며 ‘깊다’라고 ㅍ을 적는 것은 이것이 본음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한글은 탄생한 직후부터 논쟁의 대상이 됐고, 이후에도 수많은 오해와 공방을 낳았다. 가장 큰 논쟁은 “한글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물음에서 비롯됐다. 한편에서는 세종이 직접 창제했다는 친제설(親制說)을 폈고, 다른 편에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에게 명령해 만들도록 했다는 명제설(命制說)을 주장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며 협찬설(協贊說)로 절충했다.

명제설은 성현(1439~1504)이 <용재총화>에서 처음 언급된다. 성현은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해 신숙주·성삼문 등에게 명해 언문을 만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면 언문청은 1446년 11월에 처음 나온다. 이기문 교수는 “언문청은 아무리 시기를 앞당겨 잡아도 세종 제위 26년 2월 이후 설립됐다”고 말한다. 언문청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야 세워진 것이다.

명제설이 기각되면서 협찬설이 힘을 얻었다. 이기문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거의 모든 저술은 협찬설을 채택한다. 심재기 명예교수는 <한국인의 말과 글>에서 “세종이 집현전에 학자들을 모아 한글 창제의 기초 연구를 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가지 정무에 바쁜 임금이 훈민정음 창제에만 오로지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기문 교수는 세종이 한글을 직접 만들었다고 본다. 그는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이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 28자를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했다(上親制諺文二十八字).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를 훈민정음이라 하였다”고 전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에 “어제(禦制)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라고 적었다.

왕조시대에는 모든 업적을 임금에게 돌리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한글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 명예교수는 “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수많은 업적 중 ‘친제’라는 단어가 붙은 일은 한글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측면이 한글을 가리키는 단어다. 단어에는 말하고 쓰는 사람의 인식 틀에 따라 채택된다. 세종은 한글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만리는 상소에서 ‘훈민정음’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는다. 그는 한글을 줄곧 ‘언문’이라고 낮춰 부르며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최만리만 그렇게 부른 게 아니다. 세종 때 조선왕조실록은 한글을 주로 ‘언문’이라고 기록했다. ‘훈민정음’이라는 단어는 이후에는 더 뜸하게 나타난다. 한글은 ‘언문’으로 한글로 쓴 문서는 ‘언서’로 기록됐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글 창제를 위대한 업적으로 여긴 사람은 극소수였다. 신하들이 “한글을 세종이 친히 창제했다”고 기록한 데엔 왕의 치적을 늘리려는 충성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세종은 언어학자였다. 세종 한글 친제론을 펴는 이들은 세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 중 한 명이었다며 몇 가지 사실을 든다. 우선 성삼문은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서문에서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는 운학(韻學)에 마음을 두고 깊이 연구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고 썼다. 운학은 한자의 음운을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또 세종은 상소를 올린 최만리 등을 불러,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는 몇이나 있는지 아느냐”고 일갈했다.

세종은 한글에 애착이 컸다. 병환으로 요양 가서도 한글을 쓰는 연습에 몰두했다. 최만리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상소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임금의 몸)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아무리 학문을 좋아했다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글자라면 그렇게까지 공을 들였을까.

상당히 널리 퍼진 오류 중 하나는 ‘창제’와 ‘반포’의 시차를 설명하려는 일이다. 잘못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글은 1443년 12월에 완성됐다. 고쳐야 할 점을 점검하려고 <용비어천가>를 편찬했다. 과연 수정할 점이 많이 있어서 이를 다듬어 1446년 9월 드디어 완성된 훈민정음을 세상에 선포했다.’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심재기 교수는 “실록을 틀리게 해석한 탓”이라고 말한다. 1446년 9월의 해당 실록 문구는 훈민정음성(訓民正音成)이다. 이어서 세종의 서문 및 설명과 함께 정인지의 서문이 나온다. 따라서 여기에서 훈민정음은 한글이 아니라 한글을 풀이한 책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28자로 선보였고, 1446년 <훈민정음>에도 28자 그대로였다.

가장 많이 등장한 추측은 모방설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기록한 이래 한글이 어떤 글자의 모양을 본떴는지를 놓고 수많은 가설이 쏟아졌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한글이 범자(梵字·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몽고자를 참고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모방설은 근래 들어서도 속속 다른 문자를 들고 나온다. 고대 근동지역 언어·역사학자 조철수 박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 신화의 비밀>(2003)에서 한글이 히브리 문자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모든 모방설은 한글과 문자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언어학자 스티븐 로저 피셔는 <문자의 역사>(2010)에서 “한글은 다른 모든 문자로부터 독립적이며 완전하다”고 평가했다. “한글은 기존 문자를 개량한 게 아니라 언어학적 원리에 의한 의도적인 발명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한글은 소리의 특성을 낱자의 형태에 반영하고 비슷한 소리의 낱자는 기본형에서 파생시킨다는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다. ㄱ에서 ㅋ을 만들었고 ㅁ에서 ㅂ과 ㅍ을, ㅅ에서 ㅈ ㅊ을 추가했다. 영어 알파벳에는 이런 원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애써 찾아보면 B와 P가 있을 뿐이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알지 못하던 도리를 깨닫고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썼다. 신하로서 주군에게 올리는 말이었겠지만 이 평가는 결코 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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