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취업 수연이의 설 희망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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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농협 영동군지부에 입사한 이수연(19)양. 이양이 이번 설에 부모님께 드릴 용돈을 신권으로 준비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영동=김성룡 기자]

설 연휴를 이틀 앞둔 19일 충북 영동군 영동읍의 농협중앙회 영동군지부. 창구에서 일하던 이수연(19)양에게 ‘첫 직장에서 맞는 설인데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요즘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못하죠. 저는 고졸이지만 벌써 취직을 했어요. 저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다음 달 초 영동인터넷고를 졸업하는 이양은 지난해 농협의 고졸(특성화고교) 공채 때 1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이양의 집은 영동 읍내에서 20㎞가량 떨어진 양산면 가곡리다. 과수원과 논농사를 하는 할머니(78)·아버지(54)·어머니(44)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오빠(24·22)는 대학생이다. 이양은 “아버지께서 농협 팬이신데 제가 농협직원이 됐어요. 이만 한 효도가 또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양의 효도는 이보다 훨씬 먼저 시작됐다. 고교 입학원서를 쓰던 2008년 9월부터였다. 당시 대학생인 큰오빠에다 작은오빠마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어 부모님의 걱정이 컸다. 등록금 때문이었다. 인문계고 진학을 준비 중이던 이양은 과감히 진로를 바꿨다. 졸업 후 바로 취업할 수 있는 특성화고에 입학하기로 했다. 이양은 “후회는 없어요. 농협 유니폼을 입고 나가면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더 당당하다”고 말했다.

부모님·할머니 드릴 빳빳한 신권 준비했죠. 다음 꿈은 여성지점장 이만한 행복 있을까요.

 고교 3년 내내 좋은 성적을 유지한 이양은 컴퓨터 자격증을 따며 취업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담임교사로부터 ‘농협에 추천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공채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추천될지는 생각도 못했다. 성적이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이양은 면접에 대비해 한 달여간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했다. 농협영동군지부 김현성(55) 지점장은 “인사성이 좋고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며 “수연양을 보면서 채용을 잘 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이양의 모교에는 ‘경축 이수연양 농협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1967년 영산잠업고로 개교한 학교가 2001년 인터넷고로 바뀐 뒤 이양이 처음으로 금융회사에 입사했기 때문이다. 이양은 얼마 전 신문에서 ‘고졸 출신의 시중은행 여성 지점장’ 기사를 보고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농협 충북본부 최초의 여성 지점장이 되겠다는 꿈이다. 이를 위해 3년쯤 뒤엔 대학에도 들어갈 계획이다. 이양은 설을 앞두고 부모님과 할머니께 드릴 선물로 내복과 빳빳한 신권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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