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나도 고향에 가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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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

# 정상명 전 검찰총장은 퇴임 후 서울서 고향인 경북 의성 다인까지 240㎞, 600여 리를 7박8일에 걸쳐 걸어갔었다. “언젠가 영구차 타고 갈 곳, 두 다리 멀쩡할 때 걸어서 가보겠다”던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얼마 전 그가 고향까지 걸어갔던 길을 오늘(07:05)과 내일(00:25) 방영될 JTBC ‘정진홍의 휴먼파워’에서 재현하려고 동행했다. 오전 8시에 정 전 총장이 사는 한남동 집을 출발해 자정이 다 돼 다다른 그의 고향집에 들어섰을 때 반겨준 것은 은근한 달빛뿐이었다. 그 달빛 아래 그가 한 말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항상 고향집에 올 때는 어두운 밤이었죠. 한 번도 낮에 오질 못했어요. 바쁘다는 이유로….”

 # 그렇다. 언제부턴가 고향은 늦은 밤 도둑처럼 들었다가 해 밝기 무섭게 등지는 그런 곳이 돼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다녀올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거다. 아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들도 적잖기 때문이다. 정 전 총장이 내게 물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론 나는 서울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내 고향은 서울이 아니다. ‘평안남도 강서’다. 내 아버지의 고향이고 내 마음의 고향이다. 몇 해 전 평양에 갔을 때 차창 밖으로 스치는 바람 속에서조차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혼이 나와 동행하며 하염없이 울고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 설이 되면 우리 집은 즐겁기는커녕 우울했다. 아버지가 늘 우셨기 때문이다. 남자가 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난 그때 알았다. 상을 차려놓고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를 보면서 내게 고향은 ‘눈물’이었다.

 #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연히 헌책방에서 『강서군지』를 봤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강서군민회’에 갔던 기억이 나 곰팡이 핀 군지(郡誌)를 사서 들고 왔다. 곰팡이를 털고 눅눅하게 빛바랜 책을 그늘에서 말려 ‘거풍(擧風)’한 후에 조심스레 첫 장을 열었다. 누렇게 뜬 초지 뒤로 흐릿하나마 강서군 전경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나의 시선과 아버지의 시선이 거기 함께 꽂혀 있었다. 그 사진엔 옥수수밭이 지천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는 우리 집 마당에 옥수수와 피마자를 잔뜩 심었다. 정원에 옥수수와 피마자를 심다니….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겐 마음의 고향밭이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실향의 아픔을 달래고 싶었던 것임을 철들며 알았다. 그만큼 아버지의 고향은 서울서 나고 자란 나에게조차 골수에 파고드는 그 무엇이었다.

 # 설이다. 이번 설 연휴엔 해외로 여행 가는 인파가 27만2800여 명으로 사상 최대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백 배가 훨씬 넘는 3154만여 명이 고향을 찾아 가히 ‘민족대이동’을 한다. 하지만 “밤에 들렀다 동트기 무섭게 돌아 나온다”는 말처럼 만 24시간 이상 고향에 머무는 경우가 드문 게 요즘 세태다. 신(新)모계사회의 도래라고 할 만큼 며느리와 외가의 입김이 세진 탓에 주로 시댁인 고향에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 서로 떨어져 있다가 오래간만에 만난 탓에 명절엔 “마주치면 싸우니 얼른 헤어지자”는 것이 지혜로운 공식처럼 돼 버린 요즘이다. 게다가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좁고 불편한 시골집을 기피하는 현상도 이에 한몫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귀성길은 설 전날, 귀경길은 설 당일이 가장 붐빌 전망이라고 한다.

 # 휴전선이 가로막혀 갈 수 없는 실향(失鄕)의 아픔과는 달리 고향이 있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격향(隔鄕)의 시대가 그리 오래지 않아 올 것만 같다. 결국 이러다 고향에 사시는 부모님 돌아가시면 그나마 한나절이라도 고향 가는 일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명절 때면 고향 생각에 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제는 나의 모습이 돼 버린 실향민의 아들에겐 이런 걱정마저 사치스럽다. 정말이지 나도 고향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