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부·무로후시 … 일본 스포츠 ‘혼혈 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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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무로후시(왼쪽)와 이라부.

2008년 일본 프로야구 플레이오프(클라이맥스 시리즈) 한 경기에서 14개의 탈삼진, 2011 시즌 18승과 276개 탈삼진. 헌칠한 키의 이국적 용모에 뿌리는 공의 시속이 150㎞에 육박한다면 그의 프로필이 궁금할 것이다. 게다가 이름이 ‘다르빗슈 유’라면 언뜻 용병을 떠올릴지 모른다.

 이란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까무잡잡한 이 25세의 청년은 누가 봐도 일본인답지 않다. 그러나 그는 엄연한 일본인이자 일본 야구의 자존심이다. 마쓰자카를 능가하는 위압적인 직구와 현란한 변화구에 야구팬들은 환호와 갈채를 보낸다. 무엇보다 저돌적인 승부욕에서 일본인들은 잃어가는 근성(根性·일본인은 이를 곤조라고 한다)을 찾아낸다. 어쩌면 그의 출신 고교(東北高校)에서 도후쿠(東北)대지진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는 희망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변화를 갈구하는 일본인에게 다르빗슈는 때마침 나타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를 주제로 한 만화가 많은 청소년에게 읽히고 있다는 점은 이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한다. 남과 다른 이름과 외모가 오히려 변화와 도전의 상징으로 탈바꿈하는 역설에 다르빗슈의 정체성이 있다. 어쩌면 다르빗슈는 일본판 ‘완득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부터 다르빗슈가 일본 사회의 주류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오사카의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나 도후쿠고교를 거쳐 니혼햄의 마운드를 책임지기까지, 그에게도 혹독한 통과의례가 있었다. 고교 3학년 때 담배를 물고 찍은 잡지의 사진이 문제가 되어 정학처분을 받고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책임 있는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재능과는 별개로 의무가 따른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뒤 다르빗슈는 누구보다 많은 기부와 사회 공헌을 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폐쇄적인 섬나라다. 그러나 개방에 인색하거나 배타적이지 않다. 언뜻 이율배반적으로 들리지만 개방과 폐쇄 사이에는 뚜렷한 원칙이 있다. 사면이 뚫려 있는 지형답게 밖으로는 개방적이지만 내부에 이르기 위해서는 공유해야 할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화(和)이다. 화는 일본 특유의 공동체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것을 말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로페스, 뉴욕 양키스서 활약한 투수 이라부,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헤머던지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무로후시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특히 대만 출신의 왕정치는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왕정치는 일본 사람보다 더 일본인답다고 하지 않는가.

 일본인이 다르빗슈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 ‘(일본인)다움’에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나눠 가진다면 피부색과 외모는 그 가치의 외연이 확장되는 반가운 일이다. 특히 스포츠는 이런 외연의 확장에 유리하다. 최근 귀화 의사를 밝힌 축구선수 라돈치치가 태극마크를 단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혹은 한국 축구가 없어지거나 훼손되지 않는다.

김정효 박사
일본 쓰쿠바대 체육철학 전공

 글로벌과 세계화가 시대의 화두인 것처럼 회자되고 순혈의 민족에 대한 강조가 시대착오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국적을 넘나드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쇼트트랙의 안현수가 아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찬호와 박세리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것도 ‘한국인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대호에게 기대하는 것도 ‘조선의 4번 타자’이지 않은가.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을 마친 다르빗슈에게 기대는 일본인의 심정도 우리가 이대호에게 품는 바람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게 정체성이고 자존심이다. 화이불류(和而不流·어울리지만 휩쓸리지 않음)! 다르빗슈는 이런 아포리즘을 전해 준다.

일본 쓰쿠바대 체육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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