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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자네, 어느 캠퍼스 나왔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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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산업은행은 꿈의 직장이다. 이번에 신입행원 100명 중 절반을 지방대 출신으로 뽑았다. 그전까지 산업은행은 황금 스펙의 집합처였다. 서울 강남-외고-SKY대(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으로 가득 찼다. 학점과 외국어, 값비싼 해외 어학연수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최우수 인재들이다. 이들 ‘스펙 종결자’들은 과연 행복할까.

 최근 이 은행의 신입사원 이직(移職)률은 15%를 넘어섰다. 무척 높은 수준이다. 로스쿨 간다고, MBA 따겠다며 해외로 떠난 경우가 적지 않다. 인사팀이 분석한 원인은 세 가지다. 우선, 높은 기대치에 못 미치는 현실이다. 저마다 역동적인 국제투자업무(IB)를 희망하지만, 정작 IB 비중은 20% 남짓이다. 나머지는 굳이 우수 인재가 필요 없는 분야다. 공기업 임금 삭감으로 시중은행보다 낮은 연봉도 불만이다. 여기에다 지방근무 발령을 내면 “못 가겠다”며 퇴사하는 케이스도 흔하다.

 산업은행은 새로운 실험에 긴장하는 눈치다. “정확한 통계는 공개할 수 없다”면서도 “지방대 출신의 스펙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들에겐 일정기간 지방에서 근무하는 조건이 붙어 있다. 산업은행은 한편으론 자신감도 숨기지 않았다. 인사팀 관계자는 “그 정도 능력이면 지방영업에 아무 문제 없다”고 장담했다. 지방의 대출심사는 오히려 현지 출신이 뛰어나리란 기대감도 묻어난다. 정작 산업은행이 걱정하는 쪽은 노조의 움직임이다. 과거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산업은행은 1989년부터 지방대 출신을 절반 이상 뽑은 적이 있다. 당시 조순 경제부총리가 정부 투자기관에 지방대생 채용 할당제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후 노조가 “지방대 출신을 차별해선 안 된다”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똑같이 순환근무를 요구한 것이다. ‘지방 의무 복무’ 조건이 증발해 버리자 은행 측이 굳이 지방대 출신을 우대할 이유가 없어졌다. 수도권 대학들은 “서울에서 대학 다닌 게 죄냐”며 압박했다. 슬그머니 채용 할당제가 사라지면서 다시 스펙 종결자들의 독무대가 됐다.

 요즘 지방대생들에게 비수(匕首) 같은 한마디가 있다. “어느 캠퍼스에 다녔는가?”…. 서울 캠퍼스가 아니라면 찬밥신세다. 같은 논리라면 대학 4년은 헛공부나 다름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수능점수 순으로 입사하는 게 낫다. 대학생들이 LH공사의 전세임대에 구름같이 모여드는 풍경도 슬픈 현실이다. 반값 등록금에 앞서 살인적인 서울 유학경비부터 푸는 게 올바른 수순이 아닐까. 무너져 내리는 지방대를 이대로 둘 순 없다. 미친 듯한 스펙 광풍도 잠재워야 한다. 굳이 서울 명문대가 아니라면 지방 국립대에 인재들이 진학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스티브 잡스 전기를 펴낸 민음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젊은 독자들이 유난히 열광하는 대목이 있다. 대학을 중퇴한 잡스의 첫 직장인 ‘아타리’ 이야기다. 스펙만 따진다면 당연히 입사는 불가능했다. 여기에다 그는 “난 채식주의자”라며 샤워조차 안 했다. 동료들은 그의 독선과 몸에서 나는 더러운 냄새에 넌더리를 쳤다. 우리라면 당연히 해고 감이다. 하지만 그의 상사(上司)는 “밤에 혼자 나와 야간근무를 하면 어떨까”라고 권유한다. 이런 열린 회사, 열린 조직에 우리 2030세대가 환호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 닫혀 있는 느낌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갑(甲)의 기준에 맞추느라 안간힘을 쓰지만, 1%의 스펙 종결자들조차 단순업무에 불만이다. 나머지 99%의 을(乙)은 늘 고개를 숙인다. 스펙만 고집하던 일본 미쓰비시(三菱)종합상사는 80년대 후반 스포츠 동아리 출신의 활달한 영업직, 지방대 출신을 뽑으면서 효율이 높아졌다. 조직 내 스트레스는 줄었다. 우리도 정부·대기업부터 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규직 노조의 기계적 평등주의도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 “어느 캠퍼스에 다녔는가”라는 질문부터 사라져야 99%의 젊은이가 고개를 든다. 다양한 직군으로 나눠, 고졸·지방대 출신까지 뽑아야 가느다란 꿈과 희망이나마 품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2030세대와 소통하는 첫걸음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