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금융, 해법 찾기 <상>산탄데르·노르디아에서 배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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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보틴 회장

“지나치게 앞서나가지도, 그렇다고 우리 역량에 비해 단 1m도 뒤처지지 않는다. 산탄데르 은행은 글로벌 금융위기 전보다 더 강해졌다.”

 지난해 9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산탄데르 투자자의 날’ 행사에서 이 은행의 에밀리오 보틴 3세 회장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허풍이 아니다. 지난 25년 동안 그가 진두지휘한 해외 진출 덕분에 산탄데르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물론 최근의 유로존 재정위기에도 불구하고 더 강한 은행으로 거듭났다.

2007년 80억 유로였던 순익은 최근의 유로존 재정위기에도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은 재정위기 핵심국으로 전락하며 휘청거리지만 산탄데르의 브랜드 가치는 여전하다. 『브랜드 파이낸스』의 ‘가장 중요한 글로벌 브랜드’ 순위에 따르면 5년 전 23위였던 산탄데르의 순위는 지난해 4위로 도약했다.

 흔히 산탄데르의 성공 요인을 인수합병(M&A)에서 찾는다. 그러나 야심차게 해외 진출에 나서며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유럽·아시아 부문을 인수한 노무라가 외형에 걸맞은 실적을 내지 못해 고전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 단순히 M&A가 해외 진출의 모범답안은 아니다. 그렇다면 스페인 시골 은행에서 세계 대표 은행으로 거듭나면서 위기에 강한 은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답을 찾기 위해 지난 연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있는 산탄데르 본사 ‘시티’를 찾았다.

 150만ha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 위에 들어선 ‘시티’를 처음 찾는 손님은 업무와 무관하게 ‘시티투어’를 먼저 한다. 자동차로 30여 분 걸리는 투어 과정엔 보틴 회장 집무실이 있는 건물과 직원 교육을 위한 교육센터, 전 세계 37개국 지점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쉬지 않고 처리하는 데이터센터와 함께 특이한 볼거리도 포함돼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좋다는 18홀짜리 골프장과 피카소 등 명작을 컬렉션한 아트 갤러리다. 직원이나 주주뿐 아니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은행 본사가 도심이 아닌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이런 매력적인 시설 때문에 직원은 물론 고객도 ‘시티’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다.

 투어를 마친 후에야 인공호수 옆에 있는 회의실에서 호세 루이스 카스타네다 투자전략 매니징 디렉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해외투자(M&A)를 결정할 때 크게 세 가지 원칙이 있다”며 “가장 중요한 건 소매영업을 영위하는 금융회사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 조건에 맞는다면 비용 대비 효율적인 투자인가, 그리고 산탄데르 시스템을 이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본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M&A를 할 때 지분을 51% 이상 확보하고, 이게 충족되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산탄데르 은행 본사. 소매금융에 집중한 덕분에 유럽 재정위기에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산탄데르가 소매금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건 “잘할 수 있는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라”는 보틴 회장의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다. 구태여 선진 은행들이 강점이 있는 투자은행(IB)을 공략하기보다는 소매금융 진출 원칙을 고수했다. 산탄데르는 전체 수익의 77%를 소매부문에서 창출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 진출할 것인가를 고려할 때는 국내총생산(GDP)과 인구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필수적으로 고려한다. 카스타네다는 “노르웨이는 부자 나라지만 인구가 48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소매금융업이란 시각에서 봤을 때 이렇게 인구가 적은 시장은 별로 먹을 게 없어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 시장에서 하나금융·현대카드와 제휴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나, 미국 시장에 공을 들이는 것은 거꾸로 시장이 된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산탄데르가 인수합병에 나설 때는 인내심을 갖고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건 가격 얘기가 아니다. 시장이 성숙했는지, 그 시장에서 제대로 장사를 할 수 있는지 확실한 감을 잡았을 때만 움직인다는 얘기다. 영국 내 4~5위권인 애비를 인수한 건 2004년이지만 산탄데르는 그보다 14년 전부터 입질을 시작했다. 한마디로 장기 전략을 갖고 시장에 접근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공들여 진출한 다음에는 철저하게 현지화를 한다. 최고위층뿐 아니라 일반 직원 역시 99% 현지인으로 채운다. 이 같은 현지화가 가능한 이유는 그룹 전체가 동일한 IT 플랫폼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철저하게 중앙집중형으로 관리할 수 있고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IT시스템 통합에 투자해 비용을 줄이고 조직을 단순하게 유지한 덕분에 산탄데르의 효율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은 “강력한 리더십이 있음에도 이보다 더 강력한 시스템까지 있다는 게 산탄데르의 무기”라며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엄청난 빠르기로 움직이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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