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통일 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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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창극
대기자

김정일의 죽음부터 장례식까지의 광경들을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그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거의 실신에까지 이르는 모습, 추운 광장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그 눈물이 진심이냐, 연기냐를 따질 생각은 없다. 그들은 자동인형이거나 노예들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이렇게 무시된 체제가 지구상에 있었던가? 단상에 있는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그들 역시 ‘살길은 이 길뿐’이라는 절박함에 매달린 것이 아닐까.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지위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그 시스템의 노예이긴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거대한 연극무대였다. 위건 아래건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연극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세계 언론들은 “지구상에 저런 나라가 아직 있구나” 하며 신기해할 뿐이었다. 남북의 구별에 무신경한 그들이 코리안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형제의 치부가 곧 나의 것이니 우리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김정일 사후 국내외 모든 논의의 초점은 안정화냐, 위기냐로 집약됐다. 물려받은 체제를 김정은이 유지할 수 있느냐, 아니면 위기를 맞을 것이냐를 놓고 점을 치는 일이었다. 위기를 걱정하는 쪽은 북한 핵이 어떻게 될 것이냐, 난민이 몰려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의 결론은 결국 김정은 체제의 안정화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북이 다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김칫국 먼저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부도 내심 북한의 태도 변화를 바란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었다. 북한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우리에게서 어떤 변화도 바라지 말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죽음은 이렇게 한마당의 연극 구경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통일은 분명히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누구도 ‘통일’이라는 말을 꺼내려 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통일을 말하면 마치 호전적인 사람처럼 비춰지는 풍조 때문이리라. 나 역시 북한이 안정을 이루어 한반도가 평화롭게 통일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측은 이성적 판단에 기초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이성의 판단이 들어맞은 때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성적인 판단으로, 소련 체제가 무너지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있었던가?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이 나와 스스로 체제를 뒤엎을 줄 누가 알았는가? 김정일 장례식을 보면서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저런 체제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동이 트기 전 어둠이 가장 짙듯이 지금 해가 솟아오르려 하는데 우리는 어두움에 눌려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통일의 깃발을 만들어야 할 때다. 북한 내부를 자극해 분란을 일으키자는 말이 아니다. 북한이 어디로 가든 상관없이 우리는 통일의 준비를 해야 한다. 통일이라는 깃발 아래 모든 정책이 조정돼야 한다. 지금 청년 실업, 양극화, 복지, 교육 문제가 발등의 불인데 무슨 여력으로 통일까지 챙기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남쪽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통일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알자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으로 양극화된 남쪽 사회를 보면 북한 주민이 우리와 합치고 싶겠는가? 대학을 나오자마자 실업자가 되는 나라에 살고 싶겠는가? 무분별한 복지로 빚더미에 앉은 남쪽을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가 남쪽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그 깃발을 보고 북한 사람들도 희망을 갖지 않겠는가? 배고픈 북한 주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배고픈 사람에게 식량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북한 주민의 인간 존엄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북한 주민들의 희망이 중국에 있지 않고, 남쪽 동포에 있다면 통일은 반드시 우리 쪽으로 올 것이다. 통일의 깃발은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이다. 나라에 목표가 없을 때 비아냥과 조롱과 냉소주의 같은 퇴영적인 문화가 창궐한다. 목표가 생기면 이를 성취하기 위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문화가 탄생한다. 우리가 개척해야 할 북한이라는 프런티어가 생기면 젊은이들의 문화도 바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유대 국가를 창설하자는 ‘시오니즘’의 선언으로부터 50여 년 만에 성취되었다. 2000년 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던 국가도 하나의 선언을 시작으로 재탄생되었다. 애국가 후렴을 생각해 보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물려받았다. ‘大韓人’ 안중근은 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삼천리 강산에서 함께 살던 ‘大韓人’이었다. 유대인들은 없던 나라도 만들었다. 우리는 5000년 동안 함께 살던 나라를 원상회복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통일을 선언할 때 통일은 이미 미래에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