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 휩싸인 ECB … ‘유로 뿌리자’는 비둘기파에 ‘조약 위반’ 매파 강력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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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파’ 마리오 드라기 ‘매파’ 위르겐 슈타크

유럽중앙은행(ECB) 핵심 인물 한 명이 모레(31일) 그만둔다. 유로화의 통용 1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날이다. 주인공은 바로 위르겐 슈타크(63)다. ECB 정책위원이면서 집행위원이다. 핵심 인물 사퇴는 올 들어 두 번째다. 악셀 베버(44) 전 위원은 올 2월 ECB를 떠났다. 두 사람 모두 ECB 최대주주인 독일 출신이다. 두 사람이 사표를 던진 이유도 같다. ECB 내부의 정책 갈등이다. 하워드 데이비스 영국 런던정경대학 경제학 교수는 최근 인터넷 칼럼에서 “유럽 재정위기가 불거진 이후 평화롭던 ECB 내부가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맞서고 있다”며 “양쪽은 ‘상대의 주장을 꺾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갈라선 까닭은 ‘머니 바주카(Money Bazooka)포’다. 위기에 시달리는 회원국 국채 매입을 크게 늘리는 정책이다. 양적 완화(QE)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슈타크는 “유럽·미국 경제 전문가 90% 이상이 머니 바주카포만이 현재 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이는 유럽연합(EU) 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슈타크의 사표는 선제공격 성격이다. ECB 내부 분위기가 머니 바주카포를 쏘는 쪽으로 기우는 듯하자 자신을 희생해 막으려는 전술이다. 실제 그런 움직임은 일어나고 있다. 유럽 정상이 재정안정기금(EFSF)과 재정안정메커니즘(ESM) 등 기금을 조성해 위기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실패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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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볼드윈 스위스 국제경제대학원 교수는 “유럽의 위기처방이 균형을 갖추지 못해서”라고 진단했다. 그가 말한 균형은 재정과 금융 처방의 조화다. 재정을 동원한 구제금융은 금융회사 자본구조를 강화해 준다. 중앙은행의 금융 처방은 금융회사 단기 자금난을 덜어준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좋은 본보기다. 리먼 파산 이후 미국은 의회 동의를 얻어 구제금융 7000억 달러를 편성했다. 동시에 미 중앙은행은 기업어음(CP)까지 재할인해 주는 편법까지 동원해 금융회사에 단기자금을 주입했다. 그제야 미국발 금융위기는 진정 기미를 보였다.

 ECB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ECB도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시중은행에 긴급자금을 대주고 있다. 단기 급전뿐이 아니다. 최근엔 5000억 유로(약 775조원)에 이르는 만기 3년짜리 자금도 빌려주고 있다. EU 헌법의 금지를 우회해 위기에 시달리는 국가의 국채도 사들여주고 있다. 최근까지 2000억 유로어치를 사들였다.

 문제는 시장이 위기감을 털어버릴 만큼 통 큰 개입이 아니란 점이다. 미 중앙은행은 신용경색이 시작된 2007년 8월 이후 2조5000억 달러 이상을 퍼부었다. ECB도 그래야 안정기금 등과 맞물려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른바 ‘해밀턴의 원칙’이다. 미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위기가 발생하면 중앙은행은 돈으로 월스트리트에 홍수를 일으켜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마리오 드라기(64) ECB 총재가 해밀턴 처방을 쓰지 못하는 까닭은 ‘매파 5인방’ 때문이다. 그 5인방은 슈타크와 옌스 바이트만 독일 중앙은행 총재, 이브 메르슈 룩셈부르크 중앙은행 총재, 클라스 노트 네덜란드 중앙은행 총재, 안드레스 리프스토크 에스토니아 중앙은행 총재를 말한다. 이들은 유로화 가치를 위협할 수 있는 머니 바주카포 사용을 반대한다.

 매파의 힘과 영향력의 원천은 독일이 쥐고 있는 ECB 지분이다. 28%로 회원국 17개국 가운데 가장 많다. 2위 지분국인 프랑스보다 8% 많다. 또 독일의 통화관리 경험이 매파의 영향력을 강화시켜주고 있다. 독일은 1920년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엔 가장 모범적으로 통화가치를 유지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다.

 세계적인 금융통화 이론가인 찰스 굿하트(75) 런던정경대학(LSE) 석좌 교수는 “독일의 경험과 성공 스토리는 ECB의 통화관리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며 “매파들은 ECB가 98년 이후 성공적으로 물가를 관리해 온 데 기여한 영웅들”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파이낸셜타임스(FT)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요즘 ECB는 과거 성공의 덫에 걸려 있다”고 평가했다. 과거 정책 패러다임에 갇혀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일부 전문가는 ECB가 유럽과 유로체제의 최대 불안 요인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매파의 주장에 밀려 위기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내부에서도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중도파인 로렌초 비니 스마기(이탈리아)는 “ECB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하다”고 최근 발언했다. 무기력증이 엿보인다.

 대공황의 방아쇠가 된 1929년 10월 대폭락 직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비슷한 모습이다. 당시 FRB 이사도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뉘어 논쟁만 벌였다. 미 금융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매파들은 거품이 꺼지면 시장과 경제가 스스로 되살아날 것”이라며 “주가가 폭락했다고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면 버블의 불꽃이 꺼지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막혀 FRB는 위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FRB가 주가 폭락이 실물경제 붕괴로 번지도록 내버려 둔 셈이었다. 비슷한 일은 90년대 중반 일본은행(BOJ)에서도 일어났다. 일본은행 매파는 “섣불리 긴축 고삐를 풀었다가는 자산 거품이 재발할 수 있다”며 강공을 밀어붙였다. 결과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영국 사우샘프턴대 라이히 베르너(경제학) 교수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은행가의 고집과 관성은 생각보다 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논리가 아주 정교하고 타당하다”며 “토론 등으론 정책의 방향 전환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베르너 교수는 양적완화 정책을 처음 개발한 인물이다.

 ECB가 정책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선 큰 사건이 필요할 것이란 예측이 제기됐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럽의 대형 금융회사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면 ECB 안팎에서 새로운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파국의 벼랑 끝에서야 ECB의 머니 바주카포 발사가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ECB의 정책 전환이 유럽 위기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위기 해소의 출발점인 셈이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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