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중견기업 피해 주는 ‘중기 적합 업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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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전현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지난 13일 동반성장위원회는 38개 품목을 3차 중소기업 적합 업종·품목으로 발표했다. 1차에서 정해진 16개, 2차 25개까지 합치면 총 79개 품목이 적합 업종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 제도의 취지는 논의 초기만 하더라도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역할 분담을 통한 상생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중견기업의 성장을 억제하는 제도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중견기업은 대기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적합 업종·품목에 대해 확장을 자제하거나, 진입을 자제하거나, 아니면 사업을 축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해당 중견기업은 심각한 피해가 불가피하다. 그뿐 아니라 협력관계에 있는 중기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적합 업종·품목을 생산하는 중견기업과의 거래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기 적합 업종이란 장벽이 생김으로써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되는 중견기업은 총 101개사에 달한다. 2010년 기준으로 중견기업은 약 1200개이며 이 중 제조업이 500개사에 이른다. 적합 업종·품목이 전부 제조업에 속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제조 중견기업의 약 20%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중견기업으로 분류될 우량 중기들이 있다. 2012년부터 자기자본 500억원 이상 또는 3년 평균 매출액 1500억원 이상 기업도 중견기업으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새로 중견기업에 이름을 올리게 된 우량 중기 중에도 적합 업종·품목에 해당되는 사업을 하는 곳이 있다. 하나 둘이 아니고 36개사다. 이들 역시 내년부터는 사업에 제한을 받게 된다.

 그나마 동반성장위가 발표한 적합 업종·품목은 ‘자율 권고’다. 그런데 국회는 중기 적합 업종의 법제화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심지어 국회 지식경제위원회는 지난 26일 관련 법조문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두로 법안 개요만 보고받고 통과시켜버렸다.

 중기 적합 업종을 법제화하는 것은 ‘자율 권고’에서 ‘강제적 의무’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법이 제정되면 힘을 얻은 중기들의 요구는 더욱 거세질 것이며, 다른 품목 역시 적합 업종으로 선정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더 많은 중견기업의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미 중기를 보호·지원하기 위한 제도로 사업조정 제도, 사업이양 제도,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 제도, 공사용 자재 직접구매 제도, 중기 제품 구매목표 비율 제도, 중기 기술개발 제품 우선구매 제도 등 다양한 방안이 마련돼 있다. 공공기관이 물품을 입찰할 때 중기만 참여시키는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196개 품목)과 공공기관이 공사를 발주할 때 중기 제품을 직접 사서 시공사에 주는 ‘공사용 자재 직접구매대상 제품’(120개 품목) 분야에는 아예 중견기업의 진입이 막혀 있다. 이러한 보호 제도가 있음에도 또다시 중기 적합 업종을 법제화하는 것은 일종의 중복규제라 할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면서 화려한 약속을 하지만 결과를 보면 우울한 성과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기 적합 업종·품목 역시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특정 중기만 이익을 얻을 뿐 중견기업과 우량 중기는 희생시키고 기업의 성장을 억제하는 제도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중기 적합 업종·품목을 법제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현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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