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진 대기자의 인물탐구] “시민과 분리된 정당들 제 역할 못해 우리가 정치 나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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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호 11면

김기식 대표는 “20~30대는 시민적 자유를 중요시하는데 기존 정치권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정치판에 일대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재야(在野), 장외(場外) 등으로 불리며 그동안 현실 정치권 밖에 머물러 있던 시민운동가 그룹이 대거 현실 정치판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박원순 서울시장을 당선시켜 기염을 토했지만 어쩌면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시민운동권과 한국노총이 참여해 새로 탄생한 민주통합당은 예전의 민주당 또는 열린우리당과는 분위기부터가 사뭇 달라졌다. 정강·정책이 상당히 좌(左)클릭한 것은 물론, 임시 지도부 회의에서 오가는 발언의 강도도 훨씬 강하고 펀치력 있게 느껴진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중진 의원은 “민주당이 외형적으론 노무현 세력에게, 내면적으론 좌파 운동권에게 완전 점령당했다”고 한숨을 쉰다. 민주통합당에 둥지를 튼 ‘시민군’들은 내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해 본격적으로 ‘역할’을 하겠노라고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과연 이들의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까. 이들의 목표대로 정치권 장악이 이뤄질 경우 여의도 정치는 어떻게 달라질까.

민주통합당 대표 출마 선언한 ‘시민운동 1세대’ 김기식 대표

김기식(45)씨는 서울대 인류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된 후 지금까지 노동운동과 진보적 시민정치 활동에 몸담아 온 대표적 시민운동가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참여연대를 조직해 사무처장을 지냈으며, 지난해 서울대 조국 교수 등과 함께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대표를 맡아 정치참여 운동을 펼쳐왔다. 시민운동가 그룹의 민주통합당 합류 또한 그가 앞장서 이끌었다. 그가 이번에 당 대표가 되겠노라고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를 서울 서대문 ‘내가 꿈꾸는 나라’ 사무실에서 만나 시민운동가들이 왜 이 시점에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려는지, 최종 목표는 무엇인지 등을 알아봤다.

-시민단체는 정부와 정치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게 본령 아닌가. 워치독(watch dog)을 포기하고 이 시점에 갑자기 정치권에 뛰어드는 이유가 뭔가.
“유럽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서도 시민단체들이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게 보편적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존 정당이 갖고 있는 한계, 정당정치의 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정치참여를 하게 한 측면이 있다.”

-기존 정당의 한계란 무엇을 말하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매우 강한 정치적 욕구와 변화 욕구, 참여 의지가 있지만 동시에 어떤 정당으로도 수렴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을 하고 젊은이들도 투표 참여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당원은 안 하려고 한다. 서구의 경우 시민정치적 에너지가 정당정치에 수렴되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고 비정당 영역에 남아 있다. 그게 바로 안철수 현상이며,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을 만든 원천이다. 이게 지속되면 정당정치 불안정성이 계속 노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또 시민정치의 힘만으로 정치를 바꾸고, 국가를 바꿀 수는 없다. 그게 시민정치의 한계다. 그런 점에서 오늘 한국정치의 핵심은 정당정치와 시민정치를 어떻게 통합할 거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에서 훈련된, 또 일정하게 국민적 신뢰와 지지를 받았던 분들이 세력적으로 조직적으로 정당의 변화를 추진하는 게 우리 정당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시민정치가 저항적 단계에서 참여적 단계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이를 제대로 정치의 과정에 수렴시키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

-정당정치가 불신받는 원인은 뭔가.
“우선 정당들이 가장 중요한 민의 대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정당들이 그 구성원들, 특히 당원보다도 국회의원이나 소수 정치적 권력을 갖고 있는 세력의 기득권 유지나 권력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측면이 있다. 기존 정당들이 시민과 분리돼서 기득권 집단화하다 보니 정당의 본래적 기능을 상실했고, 불신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또 우리 정당들이 굉장히 노후됐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20, 30대 당원이 전체의 10%도 안 된다. 실제 유권자의 40%는 20, 30대인데. 그러니 세대적 소통의 단절이 나타나고 이들 정당에 대한 20, 30대의 불신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데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실종된 것도 중요 요인으로 꼽힌다. 시민운동가들은 장외투쟁에 더 익숙한 투사들 아닌가. 불통정치가 더 심화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물론 운동이라고 하는 건 이상적인 최선을 추구하는 게 습성이라 기존의 질서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는 이상적인 최선이 아니라 현실적인 최선을 추구하고, 그 속에서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오랫동안 시민운동에 몸담아 왔지만, 이제 정치에 참여하고 민주통합당 대표 최고위원에 도전하면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갖고 있는 이상적 가치를 계속 지향하지만 현실적 최선을 추구하는 태도로 가야 한다고 본다.”

-갈등의 정치를 타협의 정치로 바꿀 수 있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비타협적이라고 이야기들 하지만 그건 정당들이 훨씬 심하다. 사실 우리 정치가 너무 극단화돼 일절 타협이 없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권의 닉네임이 불통정권 아닌가. 이러한 불통의 정치가 시민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시민정치 세력의 등장을 만들어 낸 측면이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자기를 서울시장에 불러낸 것은 MB라고 얘기했다. 나도 그렇다. 과거 운동권과는 달리 시민운동단체들도 상당한 전문성과 역량을 갖추고, 추구하는 목표들을 실현해 왔는데 MB정권 들어서서 그 길이 완벽하게 차단됐다. 정책의 실현은커녕 소통 자체가 안 되고 오히려 시민단체 뒷조사나 하고, 정부 보조금도 막는 등 시민운동의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려고 한다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이번에 참여하는 시민운동가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내가 꿈꾸는 나라’를 비롯해 그동안 한국 시민사회에서 주요하게 활동했던 그룹의 주요 멤버들이 개인 자격으로 많이 참여했다. 이들이 모여 큰 우산을 만든 셈인데 부문별로 환경운동가, 여성운동가들이 대거 모였다. 아직 주저하고 계신 분들도 있는데 앞으로 통합된 당의 모습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시민운동가들을 최대한 많이 원내에 진출시키는 게 궁극적 목표 아닌가.
“민주통합당은 통합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통합 이후에 어떤 변화와 혁신이 이뤄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민주통합당이 도로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통합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지도부의 면모가 일신돼야 한다.”

-목표 의석 수는. 직접 출마할 건가.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시민운동에서 국민 지지를 받았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별도로 또 검증받아야 한다. 국회에 많이 진출하는 게 새로운 정치 변화를 위해 중요하긴 한데…. 최고위원에 나온 마당에 출마를 피하기 어렵겠지만 지역이라든가, 개인적으론 아직 정해진 게 없다.”

-기존 민주당 사람들, 특히 옛 동교동계 인사들을 만나보면 외형적으로는 노무현계에, 내막적으론 좌파 운동권에 접수당했다는 박탈감을 이야기하곤 한다. 실제 정강·정책부터 시민운동권의 의중이 반영된 게 아닌가.
“민주통합당의 정강·정책은 민주당에 비해 확실히 진보적이다.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시민사회 세력들이 관철해 낸 측면이 있다. 그런데 그건 근본적으로 시대 변화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나라당도 복지를 얘기하고 재벌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 아닌가. 박정희 시대부터 지금까지 추진해 왔던 성장 일변도의 전략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자기 삶의 미래 대안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거다. 시장에 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가 적절히 개입해 재분배를 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요구하는 거다.”

-개인적으로, 또는 시민사회 세력이 꿈꾸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핵심은 복지국가와 평화국가다. 국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게 복지국가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가 흔들리면 성장도 번영도 이룰 수 없지 않은가.”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스웨덴 복지국가가 완성되기까지 사민당이 40년간 집권했다. 민주진보 진영이 안정적인 수권세력을 형성하지 않으면 복지국가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통합당의 정강·정책에 그런 점들이 이미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는 진보 수준이라는 게 토니 블레어의 ‘제 3의 길’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의료보험 통합처럼 영국·독일보다 앞선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낮은 수준이다. 작금의 상황을 갖고 진보 경향성 운운하는 것은 과장된 평가다. 이제 복지국가로의 진행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거역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지 않은가.”

-사회 갈등을 줄이자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당정치가 민의를 제대로 수용한다면 장외정치, 시민정치가 왜 일어나겠는가. 현재의 정당정치에 그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엔 극좌와 극우가 문제다. 이들은 서로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자기의 존립 근거를 찾고 있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합리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다수가 되고, 이들이 경쟁하는 상황으로 가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해서 폄하하지만 진보가 자유주의를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의 결핍이다.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가 가장 넓게 공유하고 있는 게 집단주의, 전체주의다. 박정희가 국가를 위해서 국민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다면, 진보도 집단과 조직을 위해 대의라는 이름하에 구성원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세대까지 권력의 민주화에 매달렸다면, 20~30대는 시민적 자유의 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 지금 40대 이상이 20~30대와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또 한국 정치가 가치지향적 토론으로 가야 한다. 보수와 진보가 가치에 기반을 두고 진지하게 토론한다면 지금 같은 갈등 구조는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가치보다는 정치적 유·불리만을 따지는 정치공학적 논리, 진영의 논리가 판을 치다 보니 갈등이 증폭되는 것이다. 제발 한나라당에 제대로 된 보수가 나와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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