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폄하는 열등감의 다른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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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다짐이든 논쟁이든 싸움구경은 일단 재밌다. 더욱이 이 '싸움' 이 건강한 결론 도출을 위한 잠정적인 의견대립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일인데,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싸움구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8.15를 앞두고 한국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민족주의를 비판한 책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가 출간돼 논쟁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세종대 박유하(일문학과) 교수가 쓴 이 책은 더욱이 한.일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영희씨와, 부정적 일본 이미지를 확산시킨 〈일본은 없다〉의 저자 전여옥씨,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소설가 김진명씨, 서울대 신용하 교수 등 지난 몇년 동안 일본문제를 통해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해온 논객들을 실명으로, 그것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토지〉의 박경리씨나 재불 지식인 홍세화씨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의 주장은 아주 새롭지는 않지만 강렬하다. 내용의 핵심은 '일본의 실체를 모른채 몇몇 지식인들과 언론이 만들어낸 부정적 이미지만으로 일본을 왜곡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일본은 없다〉등 일본을 부정하는 책들은 대개 객관적인 근거보다 감성에 호소해 호응을 얻었던 반면,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일본 제대로 보기를 강조한 책들은 그만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국민정서 탓도 있지만, 객관성을 강조해 밋밋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논쟁적으로 주장을 펼치면서도 꼼꼼하게 자료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저자가 일본 왜곡의 첫 사례로 든 것은 쇠말뚝이다. 많은 국민들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없애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고 믿고 있고 이런 근거 아래 쇠말뚝 제거 운동까지 전국적으로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에 관한 것일 경우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무조건 성토하는" 행위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정말 일본이 쇠말뚝을 박은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왜 박았는지 충분한 검증없이 감정적으로 이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수가들의 주장대로 일본의 '교활한'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사실 확인이 없이 온 나라가 기정사실화한 점이 문제라고 꼬집는다.

저자에게 김영삼 문민정부가 밀어붙인 조선총독부 철거는 쇠말뚝보다 더한 비난 대상이다. 철거 과정도 반민주적이지만 '총독부를 바라보면 치욕을 느끼며 역사 청산을 위해 건물을 허문다' 는 주장은 언제까지나 열등감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을 요구하는 위험한 사고라는 것이다.

또 우리가 알고 있지만 굳이 목소리 높여 말하려 하지 않는 우리 내부의 모순을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고대 시가집 〈만요슈(萬葉集)〉가 한국어로 해석된다며 일본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하는 이영희씨의 〈노래하는 역사〉를 예로 들어 중국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일을 우리는 항상 일본을 향해 말하고 싶어한다고 지적한다.

전여옥의 일본비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만이 정상이라고 간주하며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우리의 태도를 꼬집는다. 일본을 향한 분노 감정이 일본을 제대로 보는 이성까지 마비시킨다는 것은 새겨 들을 만한 주장이다.

민족주의가 타자에 대한 배타주의로 이어지고 결국 우리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고 할 때 저자는 이제 '상처를 잊자' 고 제안한다.

무수한 일본 관련 책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저자가 또 한권의 책을 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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