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칸막이만 없앤다고 융합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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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강홍준
논설위원

길게는 40년 동안 각자 흩어져 살던 정부 출연 연구기관(출연연) 19곳이 하나로 합치는 작업이 한창이다. 박사 3800여 명을 포함해 식솔만 7000명이 넘고 한 해 씀씀이가 2조7000억원이나 되는 통합 출연연이 출범하는 것이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출연연 통합정책에 따르면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는 과학기술 분야 국가 연구개발(R&D) 자금 10조원 가운데 4분의 1가량이 국가연구개발원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의 단일 법인에서 집행된다.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국내 간판 출연연이 이 아래 집결한다. 물론 내년 2월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가능하다.

 1980년대 초 출연연 16곳이 9개로 통합된 적은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이런 대규모 통합은 이뤄지지 못했다. 화학적 융합은 고사하고 물리적 통합마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3년 전 KAIST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라는 고작 두 곳의 통합도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에 부닥쳐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19개가 한데 뭉치는 일이 지금 같은 정권 말기에 가능하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과학기술계에서 나올 만하다.

 이 작업을 지휘하는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 위원장의 통합 논리는 명확하다. 출연연들이 정부 부처 소속으로 흩어져 각자도생(各者圖生)하는 실정에서 미래 한국의 성장동력을 찾는 대형 국책 과제 수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처에 속한 연구소들이 인기 있는 연구 과제를 따는 데 골몰하다 보니 태양광 분야에 23개 기관이 달려들어 연구를 수행하는 일도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결국 기구 통합 논리는 부서 간 칸막이를 없애고 융합 연구를 촉진해 성과를 내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국과위는 이를 위해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회나 프라운호퍼연구회 등 같은 산하에 수십 개씩 쟁쟁한 연구소를 둔 시스템을 통합 모델로 삼고 있다. 이런 외국 유명 기관들이 소속 연구소들에 융합 연구를 장려해 기초연구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과 같은 업적을 내거나 산업에 응용될 수 있는 원천 기술을 확보해온 사례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처럼 융합이 성공하려면 고려해야 할 게 있다. 기구 통합이라는 물리적 결합이 화학적 융합에 이르는 데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연구실의 칸막이나 벽을 없애면 당장 융합 연구가 이뤄지고, 성과를 내는 게 아니다. 기초연구에 있어서 독보적인 막스플랑크연구회만 하더라도 1949년 소속 29개 기관이 통합 운영되면서 융합 효과를 내는 데 십 수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기간 동안 과학기술 연구원들 사이에 협업이라는 경험을 부단히 쌓은 것이다. 융합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창의적 마인드를 가진 연구자들에 의해 촉진되기 때문이다. 국과위 또는 다른 정부 부처의 관료주의가 판을 깨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려줘야 한다.

 특히 연구자들 간 융합의 핵심은 수평적 네트워킹이라고 할 수 있다. 수평적 네트워킹의 기본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이를 위해 서로 누가 무엇을 잘하는지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그런데도 현재 정부의 융합 논의는 상층부의 운영체제(거버넌스)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만 머물러 있다. 정작 출연연 연구원들이 움직여줘야 하는데 반응은 썰렁하다. 기회만 나면 안정된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고 싶다는 출연연 소속 연구원들이 의외로 많다.

강홍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