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김정은의 정정보도 요구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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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독재자를 보좌하는 점성술사나 역술가가 있다면 이제 전직(轉職)을 신중히 고려할 때가 된 것 같다. 2011년은 그 어느 해보다 독재자들에게 ‘잔인한 해’로 기록될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액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느니 하루 빨리 직업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올 한 해 전 세계에서 김 위원장을 포함해 6명의 독재자가 몰락했다고 보도했다.

 첫 테이프를 끊은 독재자는 튀니지의 대통령이었던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였다. ‘재스민 혁명’의 모래 폭풍에 떠밀려 23년 만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어 이집트를 30년간 철권통치해온 호스니 무바라크가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운 분노의 함성에 기가 질려 꽁무니를 뺐다. 그는 지금 철창에 갇혀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일러스트=강일구]

 가장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독재자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 반군에게 사살돼 육류 보관용 냉동고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42년 최장기 독재 기록을 세운 카다피는 지금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묻혀 있다. 반정부 시위를 총칼로 진압해 1500여 명의 목숨을 빼앗고 나서야 무릎을 꿇은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는 올해의 몰락한 독재자다. 5000여 명의 반정부 시위대를 살해하고도 ‘외세의 개입’ 운운하며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바샤르 알아시드 시리아 대통령도 조만간 몰락한 독재자 클럽 회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해는 아닌 것 같다.

 뉴스위크는 헤이그 전범재판소로 압송된 코트디부아르의 로랑 그바그보도 2011년이 낳은 몰락한 독재자 명단에 올렸지만 번지수를 살짝 잘못 짚었다. 그바그보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려다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실패한 케이스다. 성난 민심 때문에 권좌에서 쫓겨난 아랍의 독재자들과는 구별해야 한다. 하물며 현지지도 중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김 위원장을 올해의 몰락한 독재자 그룹에 포함시킨 것은 명백한 ‘분류(分類)의 오류’다. 후계자인 김정은의 효성이 지극하다면 아버지 장례식이 끝난 뒤 틀림없이 뉴스위크에 반론과 함께 정정보도를 신청할 것 같다.

 사실 김 위원장을 일반적 의미의 독재자로 분류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세습에 의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절대군주라고 하지 독재자라고 하지 않는다. ‘세습으로 권력을 물려받지 않은 상태에서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무소불위의 통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독재자의 사전적 정의다. 김 위원장은 김씨 왕조의 절대군주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유럽식 교육 경험이 있는 김정은은 이런 차이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며 아버지는 독재자가 아니었을뿐더러 백성의 버림을 받고 쫓겨난 경우는 더더구나 아니었다고 강변할지 모른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없이 많은 독재자가 있었지만 끝은 대개 불행했다. 민의를 거슬러 쫓겨나기도 하고, 물리적으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자살한 경우도 적지 않다. 옛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마오쩌둥처럼 자연수명을 다 하고 나서 격하 운동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독재자는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개인숭배를 강요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 점에서 김 위원장은 전형적인 독재자의 특성을 보였다.

 독재자는 점점 지구촌에서 희귀종으로 몰리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에서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대개 신생국의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많은 경우 독재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경제 개발을 명분으로 ‘선의(善意)의 독재’를 내세우기도 했다. 냉전 종식 이후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들을 중심으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독재자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한국과 대만이 그렇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그랬다.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동유럽의 위성국가들도 민주화 대열에 합류했다. 남미에도 바람이 불었다. 한동안 뜸하던 민주화 바람이 올 들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몰아치면서 마지막 남은 독재자들도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멸종이 멀지 않아 보인다.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심화되고 있는 빈부 격차와 양극화, 그리고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 기기가 독재자의 입지를 어렵게 하고 있다. 개방 체제를 유지하면서 대중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민중 봉기는 불가피한 수순이다. 국민의 누적된 불만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급속히 확산된다. 그 결과가 ‘아랍의 봄’이다.

 김 위원장의 사망으로 개혁·개방과 담을 쌓고 있는 북한에도 ‘평양의 봄’ 바람이 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정은의 정통성은 아버지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막아놓고, 경제적 욕구까지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80만 대까지 보급된 휴대전화가 어느 날 위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김정은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개혁·개방과 함께 입헌군주국의 실권 없는 세습군주로 변신하든가 폐쇄 국가의 절대군주로 자폭하는 길이다. 장례식을 준비하며 김정은이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