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 "현대전자 매각은 어불성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와 채권단 일부에서 현대전자 매각을 통해 현대 유동성 위기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반도체 업계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 미봉책"이라고 비판했다.

업계는 또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대전자의 자체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약화 = 업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점은 현대전자의 매각이 한국 반도체산업 전체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일본이나 미국, 대만업체가 D램 세계 1위(물량 기준), 반도체 전체 9위인 현대전자를 인수한다는 것은 곧 한국이 메모리 부문 1위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파운드리(비메모리 반도체 주문생산) 시장을 장악한데다 현금 유동성이 좋기로 이름난 대만이 인수할 경우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격'이라고 이 관계자는 비유했다.

현대전자 자산의 일부 매각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로 여겨지나 이를 통해 계열사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현대전자 내부에서도 절대적인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현대전자 관계자도 "일부 자산을 매각한다면 그 대금은 당연히 현대전자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쓰여져야 할 것"이라며 "매각대금을 계열사에 지원한다면 사외이사나 소액주주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인수설 또한 이 회사의 경쟁력을 고려치 않은 섣부른 주장으로 지적된다.

수년간의 노력끝에 겨우 비메모리 부문을 반도체 매출의 30% 이상으로 올려놓은 성전자가 메모리 사업 위주인 현대전자를 인수할 경우 이는 사업구조의 후퇴를 의미할 뿐이라는 비판이다.

▶현대전자의 경쟁력 강화 급선무 : 반도체업계는 지금은 현대그룹의 문제를 생각할 시기가 아니라 현대전자의 자체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전자도 아직 우량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고 보기 어려운 시기에 계열사 유동성 문제까지 해결한다는 것은 하나의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또 하나의 부실기업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해 5조5천억원을 투입, 256메가D램, 램버스D램 등의 차세대 도체 양산과 300㎜ 웨이퍼 신공정 구축에 노력하고 있지만 현대전자는 2조원의 자금으로 기존 공정 개선작업만을 벌이고 있다.

반도체 세계 1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삼성뿐 아니라 현대전자의 끊임없는 투자와 구개발이 필요한 상황에서 계열사 지원을 얘기한다는 것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고려치 않은 단편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현대전자는 반도체 부문 뿐만 아니라 TFT-LCD(박막액정표시장치) 등의 다른 산업분야에서도 투자 강화가 절실한 실정이다.

TFT-LCD 부문은 사업을 벌인지 얼마되지 않아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고 있으며 휴대폰 부문은 단말기 보조금 폐지로 영업이 크게 악화됐다.

현대전자가 반도체, TFT-LCD, 휴대폰, 통신장비 등의 전사업부문에서 흑자를 낼수 있는 진정한 우량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길이 멀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룹과 관계 빨리 끊어야 : 상반기 현대전자는 반도체 부문의 호황으로 6천5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결산은 5천억원 경상적자였다.

현대투자신탁의 1대 주주로서 이 회사의 손실 2천500억원을 떠안은 것이 그 결정적인 원인.

비상장주식의 계속적인 매각, 외자유치 등을 통해 지난해말 9조4천억원의 부채를 현재 8조5천억원으로 줄였지만 끊임없이 터지는 계열사의 위기는 이 회사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다행히 현대투신이 미국 AIG컨소시엄으로부터 9억달러의 외자유치에 성공할 경우 이 회사는 현대투신 1대 주주의 지위에서 벗어나 자체 경쟁력 강화에 전력을 다할 호기를 맞게 된다.

D램도 사상 최대의 호황기를 맞고 있어 지금 그룹과의 관계를 과단성 있게 끊고 세계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권고한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 5월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 때 그룹측에서 자금지원 요청이 있었지만 현대전자의 자체 경쟁력 강화에만 힘을 쏟아야 한다고 사외이사들이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앞으로 현대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는 그룹과의 관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안승섭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