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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나리의 시시각각

100세 시대, 폭주 노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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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며칠 전 신문을 보다 닮은꼴 기사 두 꼭지를 발견했다. 79세 노인이 22세 화장품 매장 점원을 추행한 사건, 또 하나는 67세 남성이 자신에게 욕을 했다며 지인(50)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남 장흥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지적장애 여성 연쇄 성폭행도 가해자 대부분이 고령이었다.

 이런 뉴스들에 유독 눈이 간 건 머릿속에 이른바 ‘9호선 막말녀’ 사건이 깊이 박힌 탓인 듯했다. 노약자석에 앉은 임산부가 무례를 지적하는 노인과 욕설 주고받는 다툼을 벌인 일이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과 서두에 밝힌 일련의 범죄 사이엔 표면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다. 하지만 나는 막말녀 사건에 대한 네티즌 반응 속에서 요즘 유독 도드라지는 노인 범죄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젊은 여성이 부모뻘 되는 이에게 독설을 퍼부었으니 비난이 집중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한데 관련 댓글엔 외려 자리 양보를 강요하는 일부 노년층에 대한 불만 토로가 적지 않았다. 요지를 짚자면 이렇다. 첫째로 양보가 필요 없는 건강한 노인도 많다. 둘째로 노년 승객이 크게 늘어 일일이 배려하기 힘들다. 셋째로 성마르고 난폭한 노인이 갈수록 자주 뵌다.

 이런 주장들을 노인범죄에 갖다 대니 아귀가 딱 맞았다. 노령층의 체력이 강해지고 수가 불어난 것은 분명하다. 범죄 행위도 눈에 더 띌 수밖에 없다. 대검찰청에 ‘범죄자 중 61세 이상의 비중’을 물었다. 1999년 2.3%였던 것이 지난해에는 5%로 커졌단다. 11년 새 두 배 이상(118%)으로 증가한 건데, 반면에 같은 기간 65세 이상 인구는 절반(51%)밖에 늘지 않았다. 노년 수감자 수도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1997년 600여 명에서 2007년 1200명, 현재는 1800여 명에 이른다. 범죄자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격리해야 할 중범죄자 비중 또한 커지고 있음이다. 여기서 세 번째 사유가 나온다. 노인들이 난폭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건 ‘선배 고령화 국가’ 일본에서는 이미 상식이다.

 일본은 1989~2005년 노령 인구가 2배 늘어나는 동안 범죄자는 5배 폭증하는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생긴 신조어가 ‘폭주(暴走) 노인’이다. ‘망주(妄走) 노인’이란 말도 쓴다. 미쳐 날뛴다는 뜻이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키워드를 찾자면 ‘소외’가 아닐까.

 지금 한국 사회는 역사상 가장 빠른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표상되는 정보사회는 노인들에겐 외려 불통을 강요한다. 마실 나갈 동네 가게는 사라지고, 생필품 하나 사려 마트까지 가야 한다. 경제적 불안감이야 말할 것 없다. 은퇴 남성들은 존재론적 혼란에 빠진다. 과거 집에서 투명인간이던 그는 이제 사회에서도 투명인간이다. 그를 도덕적·정신적으로 지탱해 주던 관계의 끈들이 하나둘 끊어진다. 자존감은 떨어지고 분노가 쌓인다. 날 선 신경은 작은 자극에도 폭발한다. 그래서 노인의 폭력은 종종 비뚤어진 호소이자 위악적 절규다. ‘나도 있다, 나를 봐 달라, 나를 보살펴 달라’.

 문득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라고 멀쩡할까. 100세 시대가 코앞이다. 돈도 문제지만 마음이 무너지면 견디기 힘들 게다. 다행히 나에겐 롤 모델이 있다. 팔순을 앞둔 시아버님이다. 11년 전 홀로 되신 아버님은 청소도, 빨래도 수준급이다. 식사는 소박하게, 술·담배는 하지 않는다. 생활은 규칙적이고 웬만한 곳은 걸어다닌다. 배움은 짧으나 동네 주민센터에서 10년 전 시작한 서예 솜씨가 훌륭하다. 수묵화, 수채화를 거쳐 요즘은 유화에 재미를 붙였다. 11평 좁은 집엔 글씨·그림이 그득하다. 할머니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허풍이 없어서다. 이 단정한 노후는 평생 가족에 붙박은 삶의 대가다. 술자리 대신 아내 곁에서 건강을 다지고 살림을 나눴다. 은퇴 충격도 자연히 덜했다.

 은퇴 준비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돈, 또 하나는 생활태도다. 재무 설계는 욕심대로 안 되지만 생활 설계는 가능하다. 서글픈 폭주 노인이 될 것인가, 품위 있는 구십춘광(九十春光)을 맞을 것인가. 우리에겐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