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7백년만에 디지털 환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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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에 담긴 청국장보다 콜라와 햄버거를 즐겨 먹고, 힙합과 랩에 열광하는 n세대. 그들에게 외면당한 채 오랫동안 ''학자들의 것'' 으로만 남아있던 우리 문화 유산이 디지털 세상에서 첨단 멀티미디어로 환생(還生)한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자 우리 문화의 정수(精髓)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국보 32호)이 ''멀티미디어 환생 1호'' . 속세(俗世)를 떠나 있던 8만1천2백여장의 경전이 7백여년 만에 21세기 첨단 매체(CD)에 담겨 세상으로 나온다.

1236년(고려 고종 23년) 강화도 선원사에서 제작, 해인사에 소장돼 온 대장경이 새 생명을 얻고 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정신문화 비전으로 변신하는 찰나다. 바야흐로 산사(山寺)에도 ''클릭'' 바람이 불고 있다.

경남 합천 가야산 자락에 자리잡은 사바세계의 정토(淨土) 해인사. 세상살이 어려움을 바랑처럼 둘러메고, 성철(性徹)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 의 쩌렁쩌렁한 법어가 아직도 여운으로 남는 산문(山門)에 들어섰다.

대장경이 소장된 장경각엔 수백여명의 관광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복을 입은 10여명의 스님이 한여름 찜통 더위에도 경판을 들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경(經 부처님 말씀).율(律 불자세계의 수행계율).논(論 제자 및 수행자의 말씀)등으로 구성된 5천2백여만자의 경전 내용을 한 자 한 자 컴퓨터에 옮기고 있다.

원본 보존부장인 남일(南一.33)스님은 "컴퓨터라는 첨단 매체를 통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유산으로 만들 작정" 이라며 "영어와 일본어 CD 제작도 추진하고 있다" 고 설명했다.

장경각을 관리하는 관후(寬厚)스님은 "나야 잘 모르겠지만 젊은 스님들이 역사적인 사업이라고 저 고생을 하고 있으니 잘 돼야지" 라며 "조금 있으면 저 많은 경판이 동그란 원판 안에 다 들어간다나" 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박상국(朴相國.54) 예능민속실장은 "대장경이 필사에서 목판.활자 인쇄, 그리고 첨단 멀티미디어로 변신하는 획기적인 사건" 이라고 평가했다.

서울 한남동에 남산을 등지고 위치한 고려대장경연구소(http://www.sutra.re.kr). 40여명의 불자(佛子)들이 컴퓨터 앞에서 해인사에서 올라온 경판의 데이터를 놓고 특수 글자 개발 및 교열 작업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해인사 도서관장 시절 일본 유학을 떠났을 때 대장경의 디지털 사업을 생각했죠.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유산을 널리 알리려면 21세기에 맞는 매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봤습니다. "

1993년 이후 8년간 디지털 대장경 연구에 전념해 온 연구소장 종림(宗林.56) 스님은 그동안의 감회에 눈시울을 적시면서 "종교를 떠나 선조의 우수한 정신 문화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싶다" 고 말했다.

26일 현재 교열작업까지 마친 글자는 4천7백여만자. 9부 능선까지 올라선 셈이다. 모든 작업이 끝나는 오는 12월 6일 15장의 CD로 만들어져 일반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러나 디지털 작업은 산고(産苦)의 연속이었다. 현재 쓰지 않는 글자 10만여자를 컴퓨터 폰트 형태로 만들고, 투자비 80여억원 중 국고 지원을 제외한 50여억원을 후원받아야 했다.

채윤기(蔡允基.64)연구소 사무국장은 "그동안 후원한 불자가 1만여명이나 된다" 며 "현재 보광 스님에 이르기까지 지관.성철.성법 등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93년 이후 해인사에서 대장경의 디지털 작업을 지켜 보았다" 고 회고했다.

방학과제로 문화재 탐구를 위해 해인사를 찾은 이영은(11.서울 무학초등4)양은 "우리 문화재를 컴퓨터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다니 기쁘다" 며 "이젠 서울에서 자동차로 6시간 가까이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 고 좋아했다.

종교 문화의 전산화 사업에 참여했던 인성정보의 원종윤 사장은 "우리 문화유산은 그 어느 것보다 우수한 콘텐츠" 라며 "종교계는 물론 인터넷 등 정보통신 업계도 앞으로 관심을 갖고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추진해야 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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