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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선택 강요하는 미국의 패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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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중국은 어떻게 미국을 패배시킬 수 있는가’. 강경파 현실주의자로 불리는 옌쉐퉁 중국 칭화대 교수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도발적인 칼럼의 제목이다. 이 글에서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荀子)에게서 답을 찾는다. 순자는 한 국가의 대외전략을 왕도(王道), 패도(覇道), 그리고 강권(强權)으로 나눈다. 여기서 도덕적 리더십으로 천하를 아우르는 방식이 왕도라면, 군사력을 이용해 경쟁적으로 천하의 일부를 차지하는 게 패도이고 강권은 강압적 방법으로 주변국에 군림하는 것이다. 

 옌 교수는 중국이 미국을 이기는 길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도덕과 규범에 기초한 모범적 리더십, 즉 왕도의 행보를 걸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내적으로는 배금주의에서 벗어나 전통적 도덕성을 회복하는 한편 경제적 양극화와 부정부패를 극복해 조화사회를 이뤄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존경받는 평화애호국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처방이다. 

 패러독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왕도의 길을 걸어왔던 미국은 이제 패도의 길을 가려 하는 반면, 이제 겨우 패도의 문턱에 들어선 중국이 왕도의 길을 희구한다는 역설이다. 사실 현대 국제정치사에서 미국처럼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과 원칙을 세우고 공공재를 제공해온 나라는 없었다. 유엔 탄생의 산파역을 맡고, 자유무역체제와 브레턴우즈 통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는가 하면 세계경찰 역할을 자임하는 등, 미국은 그간 새로운 아이디어와 어젠다 설정을 통해 문명의 표준을 만들어나가는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해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미국에서는 이러한 과거의 오로라를 찾아볼 수 없다. 지난 10월 외교안보연구원 초청으로 방한했던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의 말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국의 부상으로 한국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 한국으로서는 미국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동행했던 스테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아예 한국에 ‘미국과 중국 간에 양자택일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은 유럽의 폴란드와 유사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이들의 주문은 사실상 강요나 다름이 없다. 

 사실 이러한 현실주의적 관점은 다분히 미국 공화당 강경파의 시각을 대변한다. 놀라운 것은 민주당 소속인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구상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의 아시아 순방을 계기로 유럽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미국 외교의 중심축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러한 정책행보가 중국과의 세력권 다툼으로 비친다는 점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측근 참모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개입정책 강화 차원에서 역내의 미국 군사력을 증강시켜 나가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자유항해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남중국해를 핵심이익 수역으로 설정한 워싱턴은 베트남, 필리핀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의 뒷마당이나 다름없는 미얀마와의 관계 개선도 꾀하고 있다. 호주 다윈에 2500명 규모의 해병대 병력과 해군 함정, 전투기를 배치한다는 발표도 나왔다. 핵연료 기술 제공을 빌미로 인도와의 관계도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 기존의 한미·미일동맹을 포함하면 군사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는 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미국은 한국과의 FTA 체결과 일본을 포함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구축을 통해 중국 견제에 나서고 있다. 

 일련의 행보는 어떻게 봐도 왕도의 길을 걷던 예전 미국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합종연횡의 편 가르기를 통해 지역패권이나 다투는 패도정치의 전형이다. 이것이 과연 미국이 가야 하는 길일까. 그 같은 방식의 개입은 역내 국가들의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자국 이익을 챙기려는 편협한 꼼수에 지나지 않는 데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중국을 적으로 다룬다면 중국은 우리의 적이 될 것이다. 중국은 이미 우리의 파트너이자 경쟁자다.” 지난 11월 30일 서울국제포럼 25주년 기념 강좌에서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이 남긴 말이다. “미국과 중국은 ‘상호진화의 파트너’로서 서로 협조해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처방도 되새길 만하다. 백악관이 강단 현실주의자들의 공허한 강경론보다는 현장에서 수십 년 세월을 보낸 정책형 현실주의자들의 원숙한 지혜에 귀 기울이기를 바랄 뿐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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