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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스틸 시계값 22억 그 ‘무한 가격’의 비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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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호 26면

예거 르쿨트르의 무브먼트를 담은 상자. 1833년 무브먼트 제조사로 출발한 예거 르쿨트르는 177년 역사 동안 1000개가 넘는 무브먼트를 제작했고 다른 브랜드에도 무브먼트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9월 22일 모나코에선 ‘온리워치(ONLY WATCH)’라는 시계 경매 행사가 열렸다. 알베르 왕자가 주최하는 이 행사는 희귀성 질환인 뒤시엔 근위측증 연구기금 마련을 위해 열린다. 2005년부터 2년마다 열려, 올해 4회를 맞았다. 최고의 브랜드가 출품하고 각국 부자가 경매에 참가한다. 럭셔리 시계와 부호들이 만난 자선행사가 시계 브랜드의 자존심을 건 각축장이 된 건 당연하다. 올해는 총 450만 유로(약 720억원)의 낙찰가를 기록했다.

시계의 가치를 결정하는 ABC

이 중 파텍 필립의 Ref.3939가 140만 유로(약 22억원)에 팔려 최고가를 기록했다. 파텍 필립이 세계 최고의 브랜드인 만큼 가장 비싼 시계로 선택된 건 이변이 아니다. 더구나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미닛 리피터와 중력에 의한 시간 오차를 줄여주는 투르비용 무브먼트를 장착한 컴플리케이션 워치.
하지만 이 모델이 눈길을 끈 이유는 작은 33㎜의 ‘스테인리스 스틸’ 시계라는 점이다. 시계의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 중엔 소재도 있다. 플래티넘·골드처럼 전통적인 고급 소재가 있는가 하면 세라믹처럼 창의적인 신소재도 등장한다. 스틸은 값이 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천하의 파텍 필립이라도 스틸 시계가 22억원에 팔렸다는 건 갸웃할 수 있는 일이다.

같은 기능을 가진 시계는 과거에도 있었다. 소재는 플래티넘과 골드였다. 스틸 시계는 취급도 안 하는 럭셔리 시계 시장에서는 널린 것이 플래티넘이고, 골드다. 하지만 어떤 브랜드도 이런 시계를 스틸로 만들지는 않는다. 이 모델이야말로 진정한 온리 워치인 셈이다. 희귀성은 다른 가치를 압도한다. ‘온리워치’ 행사가 막대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한정판의 힘이다. 시계의 세계엔 한정판이 특히 많다. 수작업 때문에 대량 생산이 어려운 탓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억’ 소리 나게 비싼 가격엔 한정판의 프리미엄이 상당 부분 포함돼 있다.

까르띠에 다르(Cartier d‘Art) 컬렉션, 로통드 에나멜 곰 모티브 시계. 철사 등으로 무늬를 만들고 착색한 에나멜을 틈에 녹여 넣어 굽는 플리크아주르(Plique-a-jour) 기법을 사용했다. 빛에 비추면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효과를 낸다.

그래서 위블로의 CEO 장 클로드 비버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보려고 6000파운드(약 1000만원)가 넘는 시계를 사는 사람은 없다.”
시계 본연의 임무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오늘날 시계는 더 이상 시간에 매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시간을 알기 위해 시계를 보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시계 브랜드들은 100분의 1초까지 측정하는 완벽한 정확성을 추구한다.

1 피아제 알티플라노 43㎜: 두께 5.25㎜로 현존하는 가장 얇은 셀프와인딩 무브먼트 1208P를 탑재했다. 2 까르띠에 똑뛰 재규어: 재규어의 털과 수염을 조각칼로 섬세하게 살렸다. 국내에 한 점이 들어온다. 3 쇼파드 아울(Owl) 워치: 2010년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주얼리 부문에서 수상. 16일 갤러리아백화점 매장 오픈을 기념해 국내에서 전시된다. 4 바쉐론 콘스탄틴 울트라 파인 1968(왼쪽)과 1955:울트라 파인 1955의 두께는 4.1㎜에 불과하다. 5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아 크립티크 :3면을 가진 시계다. 사진은 후면과 마지막 면이다. 6 리처드 밀 RM 027 투르비용 라파엘 나달:‘온리 워치’에서 51만 유로에 낙찰. 케이스는 카본, 무브먼트는 티타늄으로 제작돼 무게가 20g에 불과하다. 7 제니스 크리스토퍼 콜롬보: 볼록한 케이스 안의 기계 장치가 늘 수평을 유지해 부품이 받는 중력의 영향을 제로에 가깝게 유지한다. 8 파텍 필립 Ref. 3939: 스틸 케이스와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의 조합 덕에 ‘희소성’이 커졌다.

비버 회장은 “자동차와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속도 제한이 엄격해지고, 기름값이 오르고, 스포츠카를 끌고 갈 곳이 없어도, 기술적·예술적 진화는 어딘가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동 수단이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멀어진 스포츠카 얘기는 시계에도 적용된다. 피아제의 모토는 ‘Always do better than necessary’다. 시계의 가치는 필요성 너머에 있다는 걸 뜻한다고 해도 될 듯하다.

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최소한으로 줄이고(투르비용),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고(미닛 리피터), 2100년까지 날짜와 연도를 자동으로 보정해 주는(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런 문구가 보이는 시계의 가격은 당연히 만만치 않다. 이 중 하나만 들어가도 ‘복잡하다’는 뜻으로 컴플리케이션 시계라 부르는데, 둘 이상이 동시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때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하이 컴플리케이션’ ‘마스터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처럼 길고 거창한 이름이 붙는다. 가격은 상상 초월이다.

최근의 트렌드는 한발 더 나갔다. 복잡한 기계 장치를 탑재하고도 얼마나 얇게 만드느냐, 기술적 도전이 시작됐다. 롯데백화점 해외명품담당 MD 김신욱 대리는 “기능을 보강하고도 얇고 착용감 좋은 클래식 시계를 찾는 요구가 커졌다”고 말했다. 올해 시계 시장의 주요 이슈는 ‘울트라 신(Ultra Thin)’이다.

두께 부문에서 독보적인 브랜드는 피아제와 바쉐론 콘스탄틴이다. 피아제는 오토매틱 기계식에서, 바쉐론 콘스탄틴은 수동 기계식에서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 올해 피아제는 초박형 투르비용 무브먼트가 탑재된 ‘알티플라노’ 모델을 선보였다. 두께 5.25㎜에 불과하다. 바쉐론 콘스탄틴도 ‘칼리버 1003’ 무브먼트를 얹은 4.1㎜ 두께의 ‘울트라 파인 1955’ 모델을 내놨다. 모두 각 분야에서 세계 기록이다.

이처럼 시계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술과 기능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무브먼트에서 출발한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이다. 지름 5㎝도 안 되는 판 위에 수백 개의 부품과 복잡하고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

모든 브랜드가 자체 무브먼트를 생산하진 않는다. 무브먼트, 다이얼, 케이스 등 각 부분을 제조사로부터 공급받아 조립하고 자사 로고를 달아 출시하는 브랜드도 상당수다. 이 때문에 유명하지 않은 독립 제작자나 비교적 저렴한 시계 브랜드가 소위 ‘명품’ 브랜드와 같은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일도 빈번하다. 과거 롤렉스와 파네라이, 에벨이 모두 제니스의 무브먼트 ‘엘 프리메로’를 사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브랜드들은 ‘인 하우스(in house) 무브먼트’라 부르는 자체 제작품을 사용하는 추세다. 적잖은 자금과 인력, 시간이 필요하지만 ‘좋은 무브먼트=좋은 시계’라는 공식이 통용되는 시계 산업에서 자체 무브먼트 제작은 브랜드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수준에 오르면 브랜드 자체가 경쟁력이고 가치가 된다.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고 요트·승마·폴로·골프대회를 후원해 고급 이미지를 쌓는다. 롤렉스, 오메가, 까르띠에, 파텍 필립, 브라이틀링, 태그호이어, 오데마 피게, IWC, 브레게, 쇼파드, 피아제 등 매출 상위권에 오르는 브랜드들은 모두 인지도와 품질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치를 구축했다. 올해 파이낸셜 타임스 럭셔리 콘퍼런스에서는 이런 논의가 있었다. “시계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다. 당신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얼마나 우아한지,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시계가 대변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계를 사는가는 어떤 이미지를 사느냐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통상 다른 영역에 해당하지만 보석도 시계의 가치를 결정한다. 주로 여성용으로 선보이는 하이 주얼리 워치(high jewelly watch)다. 까르띠에, 불가리, 해리 윈스턴, 쇼파드 등 보석업계에서 명성을 쌓아온 브랜드들이 뛰어난 세공 기술을 활용해 아름다운 주얼리 시계를 만들었다. 일반적인 시계 형태를 벗어난 예술적 디자인에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등 값진 보석을 촘촘하게 박은 주얼리 시계는 보석인지, 시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외양만으로 그 가치를 드러낸다. 보석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조각, 상감 등 다양한 공예 기법을 선보이기도 한다. 자체적으로 무브먼트를 생산하면서 기술력을 갖춘 시계 브랜드로 입지를 굳히는 까르띠에는 주얼리 시계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에나멜 다이얼 위에 섬세한 그림을 그리고, 색색의 돌을 모자이크처럼 촘촘하게 박는 독특한 기법으로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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