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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2) 설송 스님 “준비하고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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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98년 1월 4일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들이 한국을 찾은 세계적 투자가 조지 소로스(오른쪽 셋
째)를 만나 위기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위원들은 당시 백방으로 경제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뾰족한 한 수’를 물었다. 당시 야인이던 이헌재를 만난 유종근 위원(오른쪽 둘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왼쪽부터 허남훈·장재식 위원, 김용환 위원장, 맨 오른쪽은 이태섭 위원. [중앙포토]

천명지엄 천명무상(天命至嚴 天命無常). 하늘의 뜻은 지엄하고 또한 무상하다. 하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아도 꼭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이 허탈한 말을 얼마 전 한 역경 해설서에서 읽었다.

 정말 그런가. 그럼 1997년 끝자락, 나를 DJ 정권으로 데려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운명이라고 오래 생각해 왔다.

 처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건 설송 스님이었다. 2009년 입적한 그는 경북 봉화 현불사의 큰스님이었다. 앞을 내다보는 힘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부산 사는 후배의 소개로 처음 만난 게 96년 겨울이었다. 오전엔 조세연구원에서, 오후엔 한 법률사무소에서 자문을 해주던 때였다. 스님은 내게 대뜸 물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무슨 뜻일까. 내가 아는 세상이라야 경제뿐이다.

 “경제가 굉장히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언제쯤 끝날 것 같아.”

 “끝이 안 보이는데요. 정권 말이라 해결 방안이 안 보입니다.”

 “그렇지? 준비하고 있어.”

 선문답을 하고 돌아온 다음 해, 97년 여름에 다시 그를 만났다. 이번엔 그가 나를 먼저 불렀다. 서울 양재동의 불승종 선원이었다.

 “김대중이 (대통령) 될 거야.”

 “아, 그렇습니까.”

 “나가서 일 좀 해야 할 거야.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

 피식 웃으며 돌아서 나왔다. DJ가 당선될 거란 생각도 안 했지만, DJ가 대통령이 된들 왜 내가 DJ 정권에서 일을 한단 말인가. 그쪽 정권에 끈이나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친분으로 따지면 여권 실세들이 훨씬 많다. 선거 막바지엔 조순 전 신한국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이회창 캠프의 일을 좀 돕기도 했다.

 그해 겨울, 정말 DJ가 당선됐다. 설송의 예언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접자. 나랏일에 대한 미련은 접자’ 아직 마음 한구석에 공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잘나가던 재무부 관료에서 어느 날 급전직하, 공직에의 꿈을 접었던 아픔 때문이리라. 이회창 캠프 일을 도운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지쳤다. 마침 내게 손짓을 보내던 외국계 금융사도 있었다. 두 아이를 유학 보낸 터라 돈이 필요하기도 했다. ‘접자. 다시는 생각하지 말고 돈을 벌자’.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항상 운명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로부터 사흘 뒤인 12월 22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기고 4년 후배 정운찬, 당시 서울대 교수였다.

 “형님. 유종일 교수 아시죠. 그 형이 유종근 대통령 특보인데, 형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유 특보는 전북지사를 지낸, DJ의 측근이었다. 정 교수에게 경제 위기와 관련해 자문했는데, 정 교수는 “실무는 이분이 잘 안다”며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갑자기 서울 플라자호텔 일식집에서 저녁 약속이 잡혔다. 유 특보는 동생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와 함께 나왔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제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심각합니다. 차기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지혈하는 게 우선입니다. 제대로 된 정책을 쓸 시간이 없어요.”

 “지혈이라면….”

 “동맥이 끊어진 상황입니다. 정맥 출혈이라면 압박만으로도 피가 멎겠지만, 동맥이 끊어지면 일단 묶어야 합니다. 일단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것을 다 지키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원금을 받는 겁니다. 그 수밖에 없습니다.”

 유종근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뾰족한 한 수’를 기대한 눈치였다. 그런데 신문기사에나 날 법한 일반론을 듣고 나니 별로였을 것이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서로 약속이 있어 30분 만에 일어섰다. 그 즈음, 또 다른 운명이 나를 DJ와 엮고 있었다. 만난 사람=이정재 경제부장

정리=임미진 기자

▶고(故) 설송 스님=대한불교 불승종을 창시했다. 경북 봉화군 현불사의 큰스님으로 1996년 DJ의 당선을 예측하는 등 선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으로 정치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2009년 향년 91세로 입적했다.

▶정운찬(63)=전 국무총리, 현 동반성장위원장. 경기고 4년 후배로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왔다. 나는 그를 ‘한국 유일한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봤다. 그에게 “현실 문제에 참여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유종근(67)=경제학 박사. DJ 정권 초기에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 대통령 경제고문 등으로 활약한다. 1995년 초대 민선 전북지사를 지내고 이후 재선에 성공한다. 현 대주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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