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신뢰하면 화기애애, 마음 안 맞으면 티격태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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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19면

팀워크가 중요한 포섬 게임에서는 형제 팀이 유난히 많다. 콜롬비아의 카밀로 비예가스(오른쪽)가 동생 마니 비예가스(왼쪽)와 함께 퍼팅 라인을 신중하게 살피고 있다. [하이난다오(중국) AFP=연합뉴스]

골프는 기본적으로 개인 운동이다. 자신의 클럽으로 자신의 공을 쳐서 스코어를 겨루는 게임이다. 캐디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샷에 대한 결정은 각자 플레이어의 몫이다.
하지만 룰을 살짝만 바꾸면 골프도 단체 운동이 될 수 있다. 하나의 공을 두 사람이 교대로 치는 포섬(Foursome) 방식이 그것이다. 5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골프 월드컵이나 미국팀과 세계팀으로 나눠 자웅을 겨루는 프레지던츠컵에서 포섬 플레이가 벌어진다. 포섬은 개인 기량도 중요하지만 파트너와의 협력과 상대를 배려해 주는 마음 씀씀이, 그리고 두 사람이 지략을 모아 최선의 플레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골프에서 ‘단체 종목’의 또 다른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게 포섬이다.
 
개인 기량보다 팀워크가 더 중요
지난달 24∼27일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 미션힐스 골프장에서 오메가 미션힐스 골프월드컵이 열렸다. 국가를 대표하는 2명이 짝을 이뤄 28개 팀이 출전했다. 포볼(각자 공을 쳐 성적이 좋은 쪽을 택하는 방식)-포섬-포볼-포섬으로 경기가 진행됐다. ‘실력보다 팀워크’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대회였다.

골프도 단체 종목이 될 수 있다, 포섬의 매력

대회 마지막 날. 17언더파로 중위권을 달리고 있던 일본팀의 이케다 유타가 7번 홀(파4) 세컨드샷을 그린 뒤쪽 벙커에 빠뜨렸다. 가 보니 스탠스가 매우 나쁜 곳에 공이 놓여 있었다. 파트너인 히라쓰카 데쓰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히라쓰카는 벙커 탈출에 실패했다. 이케다의 네 번째 샷은 다행히 깃대 2m 옆으로 붙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히라쓰카의 퍼팅이 홀을 비껴갔다. 더블보기로 홀을 마감한 두 선수는 서로의 시선을 외면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다음 홀로 이동했다. 결국 일본은 12언더파 20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파트너의 실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샷도 망가지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다음 조는 한국이었다. 일본에서 활약하는 김형성(31)과 박성준(27)이 호흡을 맞췄다. 7번 홀 박성준의 세컨드샷이 홀 7m 근처에 떨어졌다. 그린에 올라온 두 선수는 홀 전후좌우를 오가며 열심히 퍼팅 라인을 살폈다. 누가 퍼팅을 할 순서인지 모를 정도였다. 박성준과 의견을 교환한 뒤 김형성이 퍼팅을 했다. 볼은 홀을 살짝 스쳐 지나갔지만 박성준이 깔끔하게 파로 마무리했다. 세계랭킹 100위 안에 올라 있지 않은 두 선수는 쟁쟁한 랭커들과 경쟁해 19언더파 공동 9위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김형성은 자신의 후배로 일본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는 박성준을 이번 대회 파트너로 선택했다. 김형성은 “성준이와는 일본에서 서로 의지하고 지내 누구보다 마음이 잘 맞는다. 이게 이번 대회 좋은 성적을 거둔 배경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성준에게 ‘포섬 게임에서 혹시 샷을 실수하면 선배에게 미안하거나 부담감을 갖게 되는 건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은 들지만 선배가 잘 마무리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포섬에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단체종목 출신 우드랜드 선전
이번 대회는 세계랭킹 3위 로리 매킬로이(22)와 2010년 US오픈 챔피언 그레임 맥도월(33)의 황금 콤비를 출전시킨 아일랜드가 우승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보였다. 아일랜드는 3라운드까지 2위에 2타 차로 앞서 우승이 유력했다. 하지만 매킬로이와 맥도월은 마지막 날 포섬에서 한 타도 줄이지 못하는 바람에 공동 4위에 머물렀다. 반면 매트 쿠차(33·세계랭킹 9위)와 게리 우드랜드(27·41위)가 팀을 이룬 미국이 마지막 날 5타를 줄이며 합계 24언더파로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은 2000년(타이거 우즈-데이비드 듀발) 이후 11년 만에 우승컵을 되찾아왔다.

우드랜드의 선전이 특히 돋보였다. 야구·농구선수로 활약하다 뒤늦게 프로골퍼가 된 우드랜드는 쿠차와 환상의 호흡을 과시했다. 4라운드 12번 홀(파5)에서 쿠차가 벙커에 빠뜨린 볼을 멋지게 세이브, 쿠차의 손쉬운 버디를 만들어줬다. 우드랜드는 우승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방식(포섬)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난 야구와 농구를 하면서 많은 선배와 붙어 봤다. 나는 스포츠의 본질인 ‘경쟁’을 즐긴다.”

파트너 잘 고른 덕에 짜릿한 우승을 차지한 쿠차는 우드랜드를 극찬했다. “그는 필드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나는 행운을 잡았고, 내가 우드랜드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정말로 짜릿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만 있는 건 아니다. 지난달 20일 끝난 프레지던츠컵에서 세계팀 동료로 나섰던 제프 오길비(34·호주)와 로버트 앨런비(40·호주)가 많은 사람 앞에서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다. 앨런비는 프레지던츠컵에서 0승4패로 출전 선수 24명 중 유일하게 승점을 따지 못했다. 앨런비는 프레지던츠컵에선 자신과 한 팀으로 경기한 레티프 구센(남아공), 양용은(한국), 오길비가 경기를 잘 풀어가지 못해 포볼과 포섬 경기에서 졌다는 투로 말했다.

특히 오길비에 대해서는 “그가 티샷을 잘못 쳐 세 번이나 내가 숲속에서 레이업을 해야 했다”고 했다. 두 선수는 지난달 27일 호주 PGA 챔피언십 우승자 그레그 찰머스(호주) 축하 파티 자리에서 말다툼을 했다. 앨런비는 와인 잔을 깨면서 “한번 해볼래”라고 말했고 오길비도 벌떡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둘은 화해하는 자리에서 다시 한번 폭발해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다.
 
“리우 올림픽서 포섬 채택 가능성 커”
국내에서는 공식 대회에서 포섬 방식을 채택한 경우는 아직 없었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 팀으로 묶이는 친선 대회에서 가끔씩 포섬 플레이를 한다. 골프가 정식종목으로 치러지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단체전 경기 방식으로 포섬을 채택할 가능성도 크다. 나상현 경희대 골프경영학과 교수는 “국가대항전이라는 상징성, 게임의 극적인 재미, 스트로크 플레이에 비해 짧은 경기 시간 등이 포섬의 장점”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골프월드컵을 후원한 발렌타인의 송현귀 이사도 “부부나 친구끼리 라운드에서 포섬 방식으로 경기를 하면 골프의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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