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 흉내 내 임진강서 뱃놀이 … 66세 때 겸재 화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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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 이태호 교수는 지난 8월과 10월 보름달이 뜨는 날 겸재의 ‘웅연계람’ 현장을 답사했다. 그림 가운데 부분이 아래 작은 사진 경기 연천군 징파나루 일대에 해당한다. 겸재가 그린 임진강 40리 뱃길 중 갈 수 없는 곳도 있었고, 산세가 변한 곳도 있었다. [동산방, 이태호 교수 제공]

“임술년(1742) 10월 보름, 연천현감 신주백과 함께 관찰사 홍상공(홍경보)을 모시고 우화정(羽化亭) 아래에서 유람하니, 소동파의 적벽 고사를 따른 것이다. 신주백이 관찰사의 명으로 글을 짓고, 내가 또 그림으로 그려 각자 1본씩 집에 소장했다. 이것이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

 개성 있게 써내려 간 행서 발문 밑에 ‘양천현령 정선 씀’이라고 적었다. 서울 견지동 동산방에서 열리는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여름·가을·겨울’전에 공개된 ‘연강임술첩’이다. 66세의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이 660년 전 소동파의 고사를 흉내 내 임진강에 가서 뱃놀이 하고 나서 그리고 쓴 화첩이다.

 연강은 경기 연천군을 지나는 임진강을 이른다. 그림은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 두 점. 삭녕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웅연에 도착해 닻 내리는 장면을 각각 담았다. 삭녕과 웅연은 경기 연천·철원 일부 지역의 옛 이름으로 각각 군사분계선 북쪽, 분계선 내에 있다. 지금은 접근이 쉽지 않은 곳들이다.

 세 사람이 한 첩씩 나눠 가졌다고 적혀 있는데, 그 동안은 한 벌만 도록으로 전해왔다. 전시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전시를 기획한 명지대 이태호(미술사학) 교수는 “해방 후 개인 화랑에서 가진 고서화 전시품 가운데 최고의 대어급 명작”이라며 “금강전도·인왕제색도·박연폭포와 아울러 겸재의 60~70세 전성기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극찬했다.

 전시엔 17세기의 창강(滄江) 조속, 연담(蓮潭) 김명국부터 18∼19세기 겸재 정선, 반봉(盤峯) 신로, 긍재兢齋) 김득신의 수묵산수화 등 50점이 나왔다. 겸재의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은 인왕산 자락 필운대에서 본 복사꽃 그득한 서울 정경으로 멀리 숭례문도 보인다.

 복헌(復軒) 김응환(1742∼1789)은 ‘방겸재금강전도’(겸재 화풍을 따른 금강산 그림)를 그리고 “임진년(1772) 봄에 서호를 위해 금강전도를 방작하다”라고 적었다. 도화서 제자인 단원(檀園 김홍도를 가르치기 위해 그려 보인 금강산 그림이다. 긍재 김득신(1754∼1822)은 삼각산 노적봉을 그렸고, 관찰사·대사간 등을 역임한 이태영(1744∼?)은 그 좌우에 정조(1752∼1800)가 지은 시를 적었다. 정조 사망 한 달 후 작품으로 신하들이 왕을 기리는 애틋함이 보인다. 전시된 그림마다 서리서리 사연이 그득하다. 다음 달 13일까지. 무료. 02-733-5877.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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