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주인공은 시대를 반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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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여러 구성 요소 중 작품과 독자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공'이다. 고난 끝에 마구를 던지거나 악당과 맞대결에 승리하며, 로봇을 타고 지구를 지키는 일은 모두 주인공들의 몫이다. 이들 주인공은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가장 빠르고 간편하게 독자의 욕망을 재현한다. 만화는 독자의 꿈을 재현하는 매체며 그 역할은 주인공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만화에는 유달리 영웅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독자의 욕망을 재현하는 주인공은 독자가 살고 있는 시대와 소통해야한다. 소통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주인공은 독자들에게 외면 당한다. 소통 없이 유행만 좇는 주인공도 단명에 그치고 만다. 문제는 소통이다. '소통'은 만화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단어다. 그야말로 밑줄 쫙∼의 키워드다. 만화는 문자 언어가 아닌 영상 언어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받아들여진다. 특히 관습과 규범에 길들여지지 않는 어린이나 청소년일수록 만화에 빠르게 반응한다.

시대와 함께 하는 주인공들

주인공들은 만화 독자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함께 소통한다. 1950년대 한국 만화를 풍미한 서부 소년과 중절모를 쓴 갱스터들은 해방 및 전쟁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할리우드의 서부영화와 갱영화 주인공들이었다. 1960년대 들며 만화의 주인공들도 다양해졌다. 어린이들과 경험을 공유하는 명랑만화 주인공들이 탄생했으며, 힘을 지닌 파워 히어로들도 등장했다. 그러나 60년대 군사정권의 검열은 다양한 주인공들의 탄생을 가로막았다. 70년대 메인스트림은 명랑만화였다. 길창덕, 박수동, 윤승운, 신문수의 주인공은 어리숙함과 천진함 혹은 만화에서만 볼 수 있는 능청스러움을 겸비하며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주인공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피로 탈취한 정권은 통금해제를 국민들에게 선사했고 그 틈에 만화방은 어린이전용에서 청소년과 룸펜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대사를 외우며 늘 찌푸린 얼굴을 보여주던 까치와 아무리 뛰어나도 까치에게만은 이길 수 없는 선천성 대결증후군에 시달리는 동탁의 꽉 깨문 입술은 80년대의 상징이었다.

허영만의 80년대 대표작 〈무당거미〉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얼굴에 그늘을 드리고 헤비급에서 플라이급으로 감량에 성공해 세계를 석권한다. 늘 외롭고 고독했던 주인공들은 다른 구단에서 방출당한 선수들이 지옥훈련을 거쳐 정상급 팀으로 재탄생하거나, 헤비급에서 플라이급으로 감량하는 등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완수해냈다. 평소에는 멍청한 캐릭터였다가 각시탈을 쓰고 절정의 고수로 변하는 강토가 등장하는 〈각시탈〉도 마찬가지. 어두움과 그늘로 대변되는 그 시절은 그랬다.

90년대가 되자 전혀 다른 독자들이 등장했다. 80년대를 보낸 독자들은 성장하며 만화를 떠나기 시작했고 7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만화의 독자로 떠올랐다. 이들에게 있어 80년대는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의 연대가 아니라 컬러 TV와 VCR로 대변되는 풍요의 시대일 뿐이었다.

독자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바뀌지 않았다. 이현세와 박봉성 등으로 대변되는 만화가들은 대본소를 통해 계속 어둡고 고독한 주인공들을 그려나갔다. 그 틈을 메운 것은 일본만화였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밝고 경쾌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래곤볼〉은 성적 판타지와 화려한 액션이 상호작용하며 독자를 끌어들였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강한 적을 만나면 주인공의 힘도 증가한다. 지구 혹은 우주의 운명을 걸고 싸우지만 까치와 같은 그늘은 찾아볼 수 없다. 싸우는 것을 즐기고 죽어도 다시 부활하면 된다. 〈시티헌터〉의 주인공인 시에바 료는 여자만 밝히는 치한처럼 보이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하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어떠한가? 늘 여자한테 차이기만 한 빨강머리 깡패가 여자 주인공의 마음을 얻기 위해 농구를 시작했고, 농구에 빠져들며 진정한 바스켓 맨으로 거듭난다. 강백호가 농구를 하는 이유는 농구가 좋아서다. 몸에 기계장치를 하면서까지 마구를 연습하지도 않고, 오른손이 망가지면 왼손으로 재기하지도 않는다. 다만 농구가 좋아서 모든 것을 걸고 농구에 임한다. 그걸로 그만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매달린다는 새로운 세대의 태제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주인공이다.

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엽기 주인공

이처럼 90년대에는 다양한 주인공들이 서로 공존하며 독자를 찾아갔다. 만화를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온 세대가 성장하면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엽기적인 주인공의 등장이다.

우리나라에 엽기만화의 붐을 불러일으킨 〈렛츠고 이나중 탁구부〉의 주인공 마에노, 이자와, 다케다 등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저지른다. 기행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이들이 있기 때문에 작품의 줄거리도 서핑하듯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미스터 부〉의 주인공 미스터 부나 전군도 마찬가지.

그들은 만화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세상을 구현하며 권위에 가득찬 기존 세상을 조롱한다. 만화 주인공들은 시대를 반영한다. 바로 지금 유행하는 만화의 주인공을 읽으면 우리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을 통해 시대를 보는 일, 과거의 만화와 오늘의 만화를 읽으며 그 시대를 읽는 일도 재미있게 만화를 보는 방법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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