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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을 보면 정치가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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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31면

예산은 조세와 정부 지출을 통해 모든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금전적 이전(移轉)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국민경제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국의 대표적 정치학자였던 라스웰은 정치를 일컬어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무엇’은 돈(예산)을, ‘누구’는 예산을 확보하려는 주역들을 의미한다. ‘어떻게’는 예산 정치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윌다브스키 교수는 “정치를 국가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누구의 주장이 관철되는가에 관한 투쟁이라고 한다면, 예산은 이 같은 투쟁의 결과에 대한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예산의 편성·심사·집행의 모든 과정에서 정부 관료, 국회의원 그리고 이해집단 간의 힘겨루기를 통해 예산이 결정되고, 각자 다른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치열한 정치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의사결정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루빈 교수는 예산협상을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train wreck)와 예산전쟁(budget battles)에 비유했다. 정부 예산안의 윤곽이 드러나면 이와 관련한 논쟁은 주로 예산의 적정규모, 재정운용 방향, 재원의 성격, 선심성·정치성 예산, 교육·복지 예산, 국가채무 규모, 세수(稅收)의 적정성, 국가·지방 재정 등에 관한 것으로 집약된다.

정·관가에선 얼마 전까지 예산과 관련한 이해 당사자들의 행태를 꼬집는 말이 회자됐다. 정부 부처에선 ‘따고 보는 것’이고, 예산실에선 ‘깎고 보는 것’이고, 국회에선 ‘심의하고 보는 것’이고, 집행부서에선 ‘쓰고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국회 예산심사 관행과 관련해선 정부 발목잡기, 당리당략, 지역사업 챙기기(소위 포크 배럴), 립 서비스 성격의 대규모 예산증액 등이 단골 메뉴로 비판받곤 했다.

예산은 정치·사회·경제적 세력들의 조정을 통한 국가 계획·정책의 청사진인 동시에 국민경제의 안정·성장을 위한 유력한 정책도구다. 이런 관점에서 역대 정부의 예산 특징을 보면 정치적 색깔이 분명히 엇갈린다. 소위 ‘개발 연대’였던 1960~70년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사회간접자본(SOC)과 산업 분야에 재정투자를 집중시켰다. 경제성장 지원과 남북대치 격화에 따른 막대한 국방비 지출도 눈에 띈다.

80년대 이후 각 정권은 국내외 경제 여건과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분야별 배분을 변화시켜 왔다. 전두환 정권에선 물가안정과 건전재정, 노태우 정권에선 시장중심경제로의 전환, 김영삼 정부는 개방화·세계화,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 추진에 재정운용의 초점을 맞추었다. 정권 초기에 4대 강 사업과 감세 논쟁이 뜨거웠던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예산배분을 집중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최근 미국을 본래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미국의 공식(American formula)’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요약하면, 교육을 강화하고, 인프라와 연구개발(R&D)에 대한 정부 투자를 늘리고, 우수한 이민 인력을 포용하며, 민간경제에 대해 확실한 규제를 하자는 것이다.

우리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심사가 마무리되면 정치권은 내년 총선과 대선 등으로 바빠질 것이다. 내년의 두 차례 선거에서는 무엇보다 복지 프로그램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하지만 복지는 한 해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중·장기 재정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지금의 정치과정을 통한 재정적 의사결정이 우리 후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재정적 부담을 물려줄 것인지, 미래 국가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신중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내년도 예산안 규모는 326조원에 달한다. 그것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국회가 미래에 대비하는 ‘한국의 공식(Korean formula)’을 어떻게 담아낼지 주목된다. 정부가 당면한 긴박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이 정치라면, 예산은 정치과정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여야 정당들이 선심성 사업에 대한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고 이번만이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예산정치를 통한 국리민복의 최적화를 도모해주기를 기대한다. 건전한 재정 없이 건전한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건전한 정부 없이 건전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해룡 입법고시(4회) 출신으로 국회에서 초대 예산분석실장, 국회 예결위 수석전문위원, 국회 예산정책처장(차관급)을 역임했다. 예산정책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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