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선 소장의 한국 자동차 비사(秘史) ⑨ 이승만 전 대통령의 난폭 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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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왼쪽)이 1920년대 말 미국에서 독립 운동할 때 동지들과 함께 자가용 앞에 앉아 있는 모습.

“허니, 플리즈 슬로 다운(여보, 제발 속력 낮추세요). 나 정말 겁이 납니다.”

 “오케이, 돈 워리 허니(알았소, 걱정 말아요).”

 “오우, 백주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속 120㎞로 달리면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소, 워싱턴DC의 프레스클럽 강연 시간이 촉박해서 달려야겠소. 걱정하지 말아요. 나의 운전 솜씨를 당신도 알지 않소.”

 “웨~엥….”

 “아이고머니나. 기어코 패트롤카에 들켰어요. 경찰이 뒤따라와요, 여보.”

 “오케이, 나도 스피드를 더 높여야지. 붙들리면 중요한 강연이 허사가 돼요. 두 눈 감고 꽉 움켜잡아요.”

 1920년대 초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남(雩南) 이승만 전 대통령은 넓은 땅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미국인들에게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강연을 통해 호소하기 위해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지키기 위해 자동차 운전은 그에게 필수적이었다. 그는 이미 1910년대 미국에서 운전을 배워 능숙한 운전자가 됐다.

 그런데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일단 스티어링휠(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과속에 난폭 운전자로 돌변해 시속 100㎞ 이상은 보통이었다. 그렇지만 일평생 동안 사고 한번 안낸 모범 운전자로도 유명했다.

1934년의 일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로 돼 있었는데 뉴욕에 왔다가 볼일 때문에 약간 늦게 출발했다. 시간이 촉박하자 그는 시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과속에 난폭 운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른 날보다도 더 과속으로 난폭 운전을 하는 이 전 대통령 때문에 그만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백주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신호도 무시했다. 시속 140㎞를 넘나드는 과속으로 질주하던 그의 차가 드디어 두 대의 경찰 모터사이클에 걸리고 만 것이다. 쫓기고 쫓는 이 전 대통령과 경찰의 레이스는 결국 이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정시에 프레스클럽에 도착한 그는 강단으로 올라가 능숙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설에 매료된 청중들은 수십 번의 기립 박수로 열광했다. 얼마 뒤 겨우 따라온 경찰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씩씩거리며 강연장 입구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나오기만 해봐라. 단번에 체포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들 역시 어느새 이 전 대통령의 열변에 빨려들어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손뼉을 치고 말았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그에게 두 경찰관은 승리의 ‘V’자를 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였다. 히죽 웃고는 옆에 따라 나오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귀에다 대고 “기동 경찰관 20년에 따라잡지 못한 단 한 사람의 교통 위반자가 있다면 바로 당신의 남편이오. 굿 럭, 마담(부인에게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하며 사라졌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전 대통령에게 운전을 배웠지만 남편과는 반대로 얌전하고 비단처럼 부드럽게 운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키 드라이버(비단결 같은 운전자)’라는 별명을 이 전 대통령이 지어준 일화도 유명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 전 대통령의 바쁜 스케줄을 도운 프란체스카 여사는 ‘1인 4역’을 했다. 때로는 이 전 대통령의 운전사로, 비서로, 타이피스트로 그러면서 주부의 자리를 지키며 헌신적인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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