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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선 지금 공기업 ‘빅 세일’중 … 한국 투자단 17명 그리스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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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그리스 헬레닉 페트롤리엄
이탈리아 에넬
스페인 에나가스
프랑스 에어프랑스-KLM

#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두 달이 지난 1998년 4월 23일. 진념 당시 기획예산위원장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주최로 열린 ‘투자 유치 서울경제회의’ 강연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남길 명백한 이유가 없는 공기업은 모두 민영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2년간 공기업을 매각해 100억 달러 정도의 외자를 끌어들일 예정” “외국인 투자자를 적극 유치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도 이런 흐름을 이어갔다. ‘헐값에 국부를 유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외자 유치와 대외 신인도 향상에 민영화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11월 28일 한국의 대기업·증권사 등 9개 회사의 투자 책임자 17명이 그리스 증권거래소와 투자청이 주최하는 ‘그리스 민영화·경제 포럼’에 참석한다. 재정 파탄에 몰린 그리스의 알짜 자산을 탐색하기 위해서다. 그리스 정부는 아테네 국제공항 등 핵심 공기업 16곳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박진형 KOTRA 이사는 “과거 한국이 어려운 시절에 공기업을 팔았지만 이제는 해외 공기업을 인수하는 입장이 됐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위기는 또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가 된다. 빚더미에 오른 남유럽 국가가 궁여지책으로 공기업 매각을 검토하면서 그동안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했던 국내 대기업·증권사·자산운용사·사모펀드(PEF) 등의 시선이 유럽을 향하고 있다. 싼값에 매물로 나올 공항·항만·천연가스 등 알짜배기 공기업을 인수합병(M&A)하기 위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원선 토러스증권 애널리스트는 “지금 유럽은 기업보다 정부가 문제”라며 “펀더멘털(기초여건)이 뛰어나 경쟁력 있는 기업이 굉장히 싸진 상황이어서 국내 기업이 공격적으로 M&A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기업 매각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그리스다. 그리스는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공기업 민영화를 포함한 500억 유로(약 77조2650억원) 규모의 공공부문 자산 매각을 추진 중이다. 28일 그리스 아테네 현지에서 열리는 민영화·경제 포럼은 지난 7월 그리스 정부가 KOTRA에 행사를 타진해 오면서 계획됐다. 재무부와 환경에너지부·투자청 등 그리스 정부 부처가 직접 행사를 주도하면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첫 대규모 민영화 설명회가 성사된 것이다. KOTRA 관계자는 “공기업 민영화 업무를 맡은 그리스 공무원이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고, 민영화 대상 기업의 실무자가 국내 참가자와 일대일 상담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직접적인 M&A까지는 아니어도 주요 인프라 기업의 주가가 급락한 틈을 노려 주식을 사들이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유럽 공기업에 투자해 온 국민연금뿐 아니라 군인공제회와 교직원공제회 등이 유럽 위기를 저가 매수의 기회로 삼고 있다. 개인투자자의 해외 주식 거래도 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3분기 해외 주식 결제 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 늘어난 2만6146건으로 나타났다. 결제 금액은 18% 증가한 26억8600만 달러(약 3조741억원)였다. 눈에 띄는 점은 금액 기준으로 해외 주식 거래의 75%가 유럽에 집중됐다는 것이다. 김효정 우리투자증권 해외주식부 과장은 “유럽 주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며 “일부 강남 지역의 고객은 각국 정부가 지분을 보유해 (상대적으로) 투자하기에 안전한 기업의 리스트를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투자자의 수요 증가에 따라 증권업계에서는 해외 주식 거래 수수료를 낮추고 대상 국가를 확대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우리투자증권 등은 실시간 투자를 위해 24시간 해외 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유럽 기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만큼 신중론도 커지고 있다. 무턱대고 해외 M&A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은 “그리스 사태로 M&A 매물로 나오는 기업이 생기겠지만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한국의 기업문화를 이식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며 “최고재무책임자(CFO)와 관리관 등을 파견하면 경영에 문제가 없다는 인식은 현실을 잘 모르는 얘기”라고 말했다. 최근 4500여 명을 감원하는 등 구조조정 수순에 돌입한 일본의 노무라증권 그룹은 ‘승자의 저주’의 단적인 예다. 노무라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 리먼의 아시아·유럽 사업부를 인수했다. 불황 뒤 호황을 대비해 이듬해에는 1000명의 직원을 추가 고용했다. 그 뒤 무리한 인수에 따른 부담으로 해외사업 부문에서 6분기 연속 손실을 기록하는 등 노무라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

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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