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전15기, 56세 사시 합격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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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5년 정도를 계획했는데 15년이 지났네요. 그래도 변호사가 돼 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합니다.”

 22일 발표된 53회 사법시험 최종합격자 중 최고령인 오세범(56·사진)씨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자 성어가 우공이산(愚公移山·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라고 했다. 법무부는 “최근 10년간 최고령 합격자”라고 설명했다.

 오씨가 사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97년이었다. 그때부터 15년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시험을 봤다. 원래 그의 꿈은 언어학자였다. 그러나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77년 유신철폐 시위를 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79년 명동 YWCA 결혼식 집회사건에 가담해 수배됐고 다시 교도소 생활을 했다.

 출소 후 기술을 배워 한 제약회사에 보일러공으로 들어갔다. 노동운동이 본격화하던 87년, 오씨는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해고됐다.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낸 데 이어 법원에 해고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법전을 찾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법률용어가 생소했지만 끈질기게 매달려 1심에서 승소했다. 2심에서 대형 로펌이 회사 측을 대리한 뒤 패소했다. 이를 계기로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고 한다.

 “법률 자문을 해 주던 김칠준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3년간 상담실장으로 일하면서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나도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지요.”

 마흔이 넘어 사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오씨를 응원했다. 그의 부인은 생계를 위해 학습지 교사부터 정수기 판매원까지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두 딸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오씨는 “큰딸은 의사가 됐고, 둘째는 육사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에게 내년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젊은 동료들에게 해 줄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개개인의 노력도 대단했겠지만 그 역시 사회적 산물이란 사실을 잊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려는 자세를 갖길 바란다”고 답했다.

 한편 법무부는 53회 사법시험에 총 707명이 최종합격했다고 밝혔다. 최고 득점자는 김수민(24·여·경북대 4년)씨, 최연소자는 박정훈(21·여·서울대 3년)씨다. 전체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은 37%(264명)였다.

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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