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보이는 '명의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며칠간 의료 파업 소동으로 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겪었다. 비합리적인 의료제도는 뒤로하더라도 파업기간동안 환자들과 환자 가족들은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많지 않음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고대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사란 환자속에서 환자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병을 치유하는 사람들을 말했다. 그런 인물을 서양에서는 성인이라 칭송하고 동양에서는 명의라하여 그 덕을 길이 후세에 전했다.

그럼 과연 명의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얼마 전에 종영된 인기 TV드라마 〈허준〉을 통해 잠시 생각해보자.

허준은 과연 어떠했는지를. 오는 병자를 마다하지 않았고, 가난하다 할지라도 그 집의 환자를 돌보았으며, 병에 걸린 사람이라면 진료를 거부하더라도 그 병을 고쳐주었으며, 아무리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한들 치료를 그만두지 않았다. 의술보다는 말 그대로의 '인술'을 펼쳐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사람이야 말로 '명의'의 이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허준과 같은 사람을 명의의 표준으로 본다면, 그 못지 않게 인술을 펼쳐 명의의 이름을 얻을만한 인물이 만화 세계에 있다. 바로 〈닥터 노구치〉의 노구치 박사, 〈닥터 K〉의 K, 〈몬스터〉의 덴마가 바로 이들이다.

〈닥터 노구치〉에서의 주인공 노구치 히데오 박사는 실존 인물이다.
19세기말에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 오른손을 다쳤는데 그것을 치료해준 의사를 보고 감명 받고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세균학계에서는 유명한 인물로 록팰러 재단과 카네기 재단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황열병 연구단의 일원이 되어 에콰도르에 입국한 후 스스로 황열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치료와 연구를 그만두지 않았던 사람. 우리가 지금 광견병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도 이 사람의 덕이 크다.

인물의 일대기 형식 만화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만화도 노구치 박사에게 우호적인 시각으로 다가서고 있다. 주인공에게 닥친 고난이 새로운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있는, 어찌보면 조금은 뻔한 스토리 전개지만, 그런 부분이야 말로 일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도 감명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닥터 K〉. 못 보신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동명의 한국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북두의 권〉의 켄시로우를 떠올리게 하는 우람한 체구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세심하면서도 정교한 의술을 갖는 K. 뛰어난 의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느 병원에도 연구실에도 소속되지 않고 떠돌아 다닌다.

이 작품은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는 없다. K가 전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의술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이야기의 단편들이 모여서 이 만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 만큼 각 편마다 전혀 다른 감동이 깃들어 있는 작품.

K는 의술로서 사람을 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의술을 이용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무찌르기도 한다. 켄시로우가 주먹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점에서는 감동과 함께 통쾌함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또한 극한의 상황에서 주변의 다양한 도구로 치료를 하는 것도 재미를 더해준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중 하나는 뼈의 마디 사이에 총알이 박혀 손으로 꺼내면 자칫 잘못해 신경을 건드릴 것 같은 환자가 있었다. 그때 K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진공 청소기. 그는 진공 청소기를 이용하여 총알을 뽑아낸다.
이런 것이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나타낸 한 장면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몬스터〉.
이 작품은 〈야와라〉, 〈마스터 키튼〉, 〈해피〉등으로 우리나라에도 다수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이다. 만화 번역가를 따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박연씨의 번역작으로 알려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은 장르가 '의사 만화'는 아니다. 사실은 스릴러 물에 속한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서 천재 아이를 만드는 계획이 실행된다. 하지만 2차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그 계획은 어둠속으로 사라졌었다. 그 어둠속에서 실행된 계획에 의해 '요한'이라는 몬스터가 태어난다.

수려한 외모, 천재적 두뇌,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사교술을 가진 몬스터인 요한. 자신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그의 존재를 알아버린 요한의 동생 안나는 어렸을 때 그를 쏘아 죽이려 하지만 병원에 실려온 요한을 주인공인 천재의사 덴마가 생명을 구해버린다.

시간이 흐르고 요한이 청년이 되었을 때 덴마를 괴롭혔던 의사 두명이 요한에 의해서 살해 당한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말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 범인을 덴마로 알고 그를 쫓기 시작하고, 덴마는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요한을 뒤쫓기 시작한다.

사실 작품을 보지 않고 이 줄거리만 본 이들은 덴마의 어디가 명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지명 수배된 덴마는 경찰의 눈을 피해 요한의 뒤를 쫓는데 만나는 환자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도 않고 치료해준다. 상대는 전직 마피아 거물일 때도 있고, 슬럼가의 가난한 환자일 때도 있고, 도시의 뛰어난 기술로 수술을 받지 못하는 시골 아낙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경찰을 치료할 때도 있다.
바로 상대가 어떠한 사람이든 치료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화속의 사람들이 그를 명의라 칭송하고 그가 잡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탄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 만화는 아직 완결이 되지 않았다. 요한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아 독자들의 애간장만을 태우고 있다. 더구나 12권과 13권 사이의 기간이 1년가량 되어 몬스터의 골수팬들은 너무나 답답해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도 그 만큼 인기가 있기때문이 아닐까.

공자의 정명사상에 따르면 '자신의 맡은 바를 다하면 그 사회는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고 했다. 의사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것이 아직은 그렇지 못한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