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떠났다는 노숙인, 주변서 출퇴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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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새벽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인이 잠을 청하고 있다. 역사 내 노숙인 강제퇴거 석 달째,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광장과 근처 지하도로 노숙인들이 옮겨가고 있다. [김태성 기자]

20일 오후 11시 지하철 서울역 6·7번 출구 지하도. 폭 7m 통로엔 담요를 몸에 말고 그 위에 종이 상자를 덮은 노숙인 60여 명이 양 벽에 붙은 채 누워 있었다. 서울역사 내 노숙인 강제 퇴거 석 달째,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이 지하도는 역사에서 쫓겨난 노숙인들의 잠자리가 되고 있었다.

 서울역 안에서 6년 동안 노숙을 했다는 상모(55)씨는 지난 8월 강제 퇴거가 시작된 후 지하도로 자리를 옮겼다. 상씨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 오는 순서대로 안쪽을 차지하고 눕는다”며 “서울시에선 쉼터로 안내를 한다는데, 답답하고 도둑도 많고 재활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돼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오후 3시부터 이미 자리를 펴고 누워 있던 정모(64)씨는 “서울역에 온 지 10년째인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다들 지하도로 몰려온다”며 “원래 있던 사람들은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역이 문을 닫는 오전 1시30분이 되면서 역사 밖으로 나온 노숙인 30~40여 명이 추가로 지하도로 내려왔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하면 30명 정도가 더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같은 시각, 서울역에서 한두 정거장 떨어진 을지로입구역, 시청역, 충정로역, 남대문시장·한국은행 지하통로 등에도 서울역 출신의 노숙인들이 나타났다. 낮에는 서울역 주변을 맴돌다 밤이 되면 잠자리를 찾아 주변 역으로 퍼지는 것이다. 시청역에서 만난 김종문(51)씨는 “너무 추울 땐 지하철역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 말리는 기계에 몸을 녹인다”며 “다들 임시주거 혜택을 받지 못해 지하도로 가는 게 낫다고 말한다”고 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강제 퇴거를 시작한 지난 8월 서울역사 주변 노숙인이 286명이었으나 10월엔 223명으로 63명이 줄었다. 서울시 자활지원과 담당자는 주변 쉼터에서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자가 실제 현장을 돌아보니 상황은 달랐다. 쉼터로 유입된 경우보다 서울역 주변이나 다른 지하철역으로 옮겨간 경우가 많았다.

‘비전트레이닝센터’ ‘가나안쉼터’ 등 노숙인 쉼터에서도 “서울역 강제 퇴거로 수용 인원이 늘어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홈리스대책마련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이동현(35)씨는 “노숙인도 인간관계, 일자리, 즐겨 찾는 사회복지기관 등 나름대로 자기 생활권이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기가 쉽지 않다”며 “우리가 파악하기엔 서울역 근방 노숙인은 총 280~300여 명으로 강제 퇴거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노숙인 활동 반경이 역사 밖으로 확장되면서 관리 및 보호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서울역 지하도는 늘어난 노숙인 때문에 통행량이 급격히 줄었다. 또 소주병, 종이박스 등이 어지럽게 남아 있어 경관을 해치기도 한다. 노숙인의 인권도 문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동사할 위험이 있고, 지나가는 취객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일도 벌어지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 내놓은 대책 역시 실효성 여부가 논란이다. 서울역 앞에 설치된 24시간 위기관리센터의 경우 21일 오전 2시에 찾아가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노숙인 지원단체인 ‘다시 서기 상담보호센터’ 이정규 팀장은 “동절기에 역 안에서 자던 150명의 노숙인을 어디로 수용할 것인지 걱정”이라며 “장기적인 대책을 구상 중이라지만 당장 임시 주거, 동사 예방, 응급 구호 등 우려되는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글=김효은·정종훈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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